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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Nov 07. 2023

[D-55] 몸과 마음의 추위

311번째 글

갑자기 날이 추워졌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팔 티셔츠에 바람막이만 걸치고 다녀도 괜찮았을 만큼 날씨가 따뜻했었는데 갑자기 겨울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다. 바람은 매서워졌고 공기는 얼어붙었다. 이렇게 날이 차가워져서인지 나는 최근 며칠 동안 나를 따뜻하게 해 주는 것들을 하나둘씩 차례로 꺼내고 있다. 겨울용 운동화로 갈아 신고, 집에서는 수면양말을 신고, 도톰한 잠옷을 꺼내 입고, 두꺼운 니트와 긴 코트를 내놓고, 쟁여둔 핫팩도 하나씩 꺼내 두고, 발난로 용도로 책상 밑에 놓아두는 건식 족욕기의 코드를 꽂았다. 먹는 것도 그새 달라졌다. 이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니라 뜨거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저녁 메뉴를 고를 때는 어쩐지 따뜻한 국물 요리가 끌린다.


이렇게 나는 차근차근 겨울나기를 준비하고 있다. 겨울을 준비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계절은 약속한 듯이 언제나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 시기가 되면 이런 걸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이미 여러 번의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올해는 겨울이 오지 않을 거라는 불확실함은 없기 때문에 나는 겨울을 쉽게 준비할 수 있다. 또 날이 추워지는 것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나 스스로 아주 명확하게 느낄 수 있다. 차가운 온도를 감지하는 일에는 시간차가 생기지도 않는다. 추운지 아닌지를 판단하려고 노력하거나 일부러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없다. 날이 추워지면 나는 바로 그 사실을 느낄 수가 있다. 내 몸이 춥기 때문에 나는 자연스럽게 나를 따뜻하게 해 주는 것들을 꺼내 놓을 수 있다. 추우니까, 그게 느껴지니까, 따뜻해지고 싶으니까,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아니까. 또 그것들이 나를 따뜻하게 해 줄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그런데 몸이 쌀쌀해지는 것과는 달리, 마음이 쌀쌀해지는 것은 대비하기가 참 어렵다. 마음의 추위는 예고도 없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일정한 주기도 약속된 시기도 없이 갑작스레 나를 찾아오곤 한다. 얼마나 길어질지도 예상하기 어렵고 과연 끝이 있을지도 알 수 없다. 얼마나 더 추워질지도 모르고. 또 마음의 추위는 알아채는 것 자체도 힘들다. 내 마음이 지금 추운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한참 동안 신경써서 관찰하고 관심을 기울여야만 한다. 가끔씩은 내가 추울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나중에 돌이켜보면 그때 내 마음은 차디차게 얼어붙어 찬 바람만 잔뜩 불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미리 준비하지도, 이미 닥친 추위를 해결하지도 못하고 가만히 얼어 있는 경우가 많다.


또 마음의 추위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알쏭달쏭하다. 다행히 내가 춥다는 것을 제때 알아챈다고 해도, 과연 어떤 것들이 나를 따뜻하게 해 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떨고 있는 마음을 덥히기 위해서 이것저것 시도해 볼 수는 있지만 확신을 갖지는 못한다. 효과가 있으면 다행이고 없으면 본전이고 더 나빠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 그리고 마음은 몸보다 반응 속도가 더 느리다. 마음에는 잠복기가 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추운 마음을 감싸 안기 위해서 한 일들이 전혀 효과가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나중에서야 그 일이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또 반대로 내가 한 일들이 지금 당장은 효과가 있는 것처럼 느껴져도 사실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거나 오히려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챌 수도 있고. 마음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다. 마음은 몸만큼 솔직하지 않고 몸만큼 노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에도 난로를 켤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음에 입을 수 있는 스웨터와 코트가 있었으면 좋겠다. 마음에도 수면 양말을 신기고 장갑을 끼우고 목도리를 두를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음도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따뜻한 코코아를 마시고 노곤해질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면 적어도 온도계를 꽂아서 마음의 온도를 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온도를 재 봐서 열이 나면 해열제를 먹고 체온이 떨어지면 담요를 두를 수 있으면 좋겠다. 내 마음이 추운지 아닌지 알 수 있도록, 그리고 추위에 제때 잘 대처할 수 있도록.



/
2023년 11월 7일,
식탁에 앉아 열어 놓은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Nataliya Melnychuk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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