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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Dec 10. 2023

[D-22] 없애고 싶은 감정들

344번째 글

나는 감정을 아주 진하게 느끼는 편이다. 어떤 것을 보았을 때 느끼는 감정이 훨씬 더 다양하고 폭넓고, 같은 감정이라도 보다 더 깊게 느끼곤 한다.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 비해 감정을 더 깊고 풍부하고 많이 느낀다는 점은 좋은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다. 이를테면 평소에 감정이 널을 뛰곤 한다던가,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이 느껴지면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다던가, 내 감정 상태에 스스로 영향을 많이 받아서 피곤하다던가 하는 것들이 나를 힘들게 만든다. 그래서 가끔 어떤 감정들은 아예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내가 특히 없애고 싶은 감정들은 부끄러움, 후회, 울적함, 짜증 같은 기분들이다. 나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런 감정들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 보려 해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느껴진다. 슬픔이나 두려움 같은 건 왜 느끼는지도 이해가 되고 어느 정도는 느껴야만 한다는 것도 알겠는데, 이런 감정들은 그냥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으면 좋겠다. 아예 몰랐으면 싶다. 인류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감정들은 느끼지 않는 방향으로 진화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러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도 어딘가 쓸 데가 있으니까 수만 년이 지나는 동안 남아 있었을 것이다. 정말로 불필요한 것이었다면 이런 감정을 느끼는 개체들은 일찍 죽거나 경쟁에서 밀려 유전자를 남기지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나는 이렇게 태어난 이상, 이 커다란 감정들과 평생 함께 살아야 한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하는 생각처럼 이런 감정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건 이 감정들과 함께 생활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가 해야 하는 건 이 감정들이 왜 존재하는지, 그리고 이 감정들이 나의 생존에 왜 필요했는지를 생각해 보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씩 생각해 보고 있다. 부끄러움, 후회, 울적함, 짜증 같은 기분들에 대해서. 부끄러움은 왜 느끼는 걸까? 나는 때때로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 내가 살면서 저질러 온 잘못들도, 끊임없이 하고야 마는 실수들도, 불완전한 나 자신도, 정말 부끄럽고 창피하다. 하지만 이렇게 내가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나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다. 누군가의 앞에서 떳떳하기 위해서. 나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해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부끄러움은 나는 열심히 살아가고 바르게 살아가게끔 해 준다. 후회도 비슷한 역할을 한다. 나는 후회를 통해 예전의 잘못들을 다시 저지르지 않을 수 있다. 후회되는 일들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후회할 만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말이다.


울적함은, 글쎄, 부끄러움이나 후회보다는 조금 더 어렵다. 언제나 밝고 쾌활하기만 한다면 삶을 훨씬 더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 거고, 효율성이나 생산성도 올라갈 텐데. 울적한 기분에 젖어 무기력해지는 건 정말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나는 내가 울적할 때 나 자신에게 집중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나의 시선은 대체로 밖으로 향한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 세상을 본다. 하지만 울적한 기분이 들 때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울적함은 나의 에너지가 나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해 준다. 그래서 내가 나를 돌아보고 아픈 곳은 없는지 살펴보고 내 마음을 잘 돌보게끔 만들어 준다.


짜증은 내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밖으로 발산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에 중요하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짜증을 낸다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짜증을 내고, 그 짜증스러운 기분 때문에 예민해져 있곤 한다. 그 예민한 기분을 나는 싫어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짜증을 내지 않는다면 더 커진 감정들을 더 길게 마음에 담아 두게 될 거라는 생각도 든다. 짜증을 내면서 나는 내가 갖고 있던 성가신 기분들이나 불편함들을 표출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겉으로 감정을 꺼내 놓으면서 나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밖으로 뱉어낸다. 짜증 덕분에 나는 화를 속으로 삭이지 않을 수 있고, 스트레스가 걷잡을 수 없이 내면으로만 쌓이는 상황을 막을 수 있다.


불필요한 감정이란 없다. 아무리 쓸모없고 내게 악영향만 끼치는 것 같은 감정들이라도 그 감정은 내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했기 때문에 갖고 태어난 것이다. 그 감정들을 미워해 봐야 달라지는 건 없다. 오히려 스트레스만 올라갈 뿐이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 이 감정들과 함께 살아가는 데에 도움이 된다. 나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다양한 감정을 진하게 느끼면서 살아갈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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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10일,
소파에 앉아 스포츠 중계 소리를 들으.



*커버: Image by sendi gibran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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