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기록] 베니스의 상인 - 윌리엄 셰익스피어

2025년 독서 챌린지, 일곱 번째 책

by 슬로

<베니스의 상인>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의 핵심 기억이 있다. 한 가지는 아주 어릴 때 이 책을 어린이를 위한 명작선 세트로 처음 접했을 때의 기억이다. 그때 나는 '살은 베어내도 좋지만 피는 흘려선 안 된다'는 판결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살을 베어내면 피가 흐르는 건 당연한데 그걸 빌미로 협박을 하는 건 앞뒤가 안 맞는다고 말이다. 어린이용으로 각색된 책의 교훈은 분명 샤일록처럼 탐욕을 부리지 말자는 거였을 텐데, 그런 교훈보다는 판결 자체에 대한 의문이 더 인상 깊게 남았었던 것 같다.


이 책과 관련된 두 번째 기억은 몇 년 전에 국립창극단의 창극 <베니스의 상인>을 관람했던 기억이다. 나는 창극을 좋아해서 국립창극단의 작품은 웬만하면 전부 보는 편인데, <베니스의 상인>을 봤을 때는 상대적으로 실망스러운 경험을 했다. 물론 참신하다고 생각했던 부분도 있었고 마음에 드는 각색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각색과 작창 면에서 아쉬움이 컸다.


이 두 가지 핵심 기억 때문인지 이번에 <베니스의 상인>을 다시 읽었을 때는 두 가지 측면에서 고민이 깊었다. 첫 번째는 법과 정의에 대한 고민, 두 번째는 고전을 현대에 맞게 재구성하는 것에 대한 고민.


법과 정의에 대한 고민은 <베니스의 상인>을 읽기 직전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책을 읽는 동안은 물론 읽은 이후에도 정의가 과연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이 작품 내에서의 법적·사회적 정의를 고민하게 되었다. 샤일록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를 당하고 있다. 그는 평소에 자신에게 혐오 발언을 일삼던 안토니오에게 복수를 하려고 한다. 마지막에 포샤가 내린 판결은 외국인을 배척하는 법률을 근거로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판결이 정의로운가? 과연 정의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 이전에 정의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런 질문들이 나를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게 만들었다.


두 번째, 고전의 재해석에 대한 고민은 창극 <베니스의 상인>을 봤을 때부터 했던 고민이다. 원작 <베니스의 상인>에는 반유대주의 정서가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다. 돈을 밝히는 사악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은 유대인 스테레오타입의 전형이고, 다양한 유대인 혐오적인 대사들이 등장하며, 샤일록이 베니스의 기독교인들에 의해 조롱당하고 몰락하는 결말을 맞이한다. 물론 오히려 위선적인 기독교인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면모도 있지만 샤일록과 달리 이 기독교인들 중 누구도 처벌받거나 반성하지 않고 오히려 '비열한 유대인'을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다는 점에서 불편함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베니스의 상인>을 다시 무대에 올린다면, 이 작품 속에 담긴 낡고 불편한 면모들을 어떻게 현대에 맞게 재해석할 수 있을까? 창극 <베니스의 상인>은 아예 작품 내에서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각색했었다. 창극에서는 유대인 샤일록은 거대 자본과 독점을 통해 시장을 장악하려는 대기업으로, 기독교인 안토니오와 다른 베니스의 상인들은 소상공인으로 바꾸어서 그려낸다. 그래서 아예 이 작품을 유대인에 대한 내용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낸다.


이 각색은 내가 창극 <베니스의 상인>을 봤을 때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지점이었다. 그러나 이 각색은 한편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각색한 것이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도 든다. 유대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 자체가 부재하다시피 하고, 다양한 인종 및 정체성의 representation에 대한 논의가 그다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 유대인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가능했다고 말이다. 그러나 만약 이 작품을 브로드웨이에서 다시 올린다면 이러한 접근은 자칫 잘못하면 유대인을 지워버린다는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샤일록의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대로 둔 채로 작품 속에서 유대인 혐오에 대한 언급을 없애는 것도 비슷하게 문제가 될 수 있다. 과거에 유대인이 받은 차별을 없던 일처럼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야기 속에 유대인과 반유대주의적 시대상을 그대로 놔둔 채로 각색한다면, 어떤 방향이 적절할까? 샤일록을 극의 주인공으로 끌어내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샤일록의 몰락이라는 극의 기본 플롯은 그대로 둔 상태에서 이야기를 '기독교인의 승리'가 아닌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그로 인한 비극적인 몰락'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셰익스피어 비극들처럼 샤일록이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사회적 차별과 혐오 속에서 쌓아 올린 복수심이라는 개인적 감정 때문에 끝내 처절하게 몰락하게 되는 이야기로 약간만 비튼다면 어떨까?


그러나 이 방향성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야기의 초점과는 무관하게 이 작품이 여전히 유대인에 대한 다양한 혐오 발언을 자유롭게 쏟아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 때문에 불쾌하게 여길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스테레오타입의 강화 측면에서 염려를 보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훼손하는 거라고 여길 수도 있다.


어쩌면 디즈니 플러스 식의 방법을 쓸 수도 있을 것이다. 디즈니 플러스에서 고전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찾아보면 종종 경고문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오래전 만들어진 원작을 그대로 제공하며 스테레오타입 및 부적절한 묘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경고문이다. 디즈니의 이런 경고문은 과거를 지우지 않으면서 다양성에 대한 건설적인 토론을 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베니스의 상인>도 비슷하게 원작은 그대로 두되 작품 속의 반유대주의적 정서에 대해 비판적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시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접근 방식 역시 나이브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디즈니 작품들은 수정이 어려운 이미 만들어진 영상물이지만 <베니스의 상인>은 무대화하는 과정에서 얼마든지 연출 및 각색을 다르게 할 수 있는 희곡이라는 점 역시 문제다. 조금 더 적극적인 방법을 취할 수 있는데, 원작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 자체가 어떠한 의도를 띠고 있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고전의 각색은 늘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언제나 더 깊고 중요하게 논의되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예술은 언제나 시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작 <베니스의 상인>은 베니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결국 16세기 영국인 관객들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고, 16세기 영국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21세기 미국에서 <베니스의 상인>을 다시 무대에 올린다면 그 작품은 21세기 미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과 같다. 또 한국에서 <베니스의 상인>이 공연된다면 우리 사회의 단면을 담고 있어야 한다.


과연 어떤 방향이 고전을 다시 현대에 맞게 불러올 수 있는 적절한 방법일까? 이러한 관점에서 올바름이란 무엇이고 정의란 또 무엇일까? <베니스의 상인>을 읽고 고민이 더 깊어지고 있다.




*커버: Unsplash의 Rebe Adelai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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