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독서 챌린지, 열한 번째 책
<하얀 성>의 결말은 놀랍지 않다. 왜냐하면 첫 페이지를 읽었을 때부터 이 이야기의 결말을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의 화자인 '나'는 누군가와 신분을 바꿔서 살아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결말을 안다고 해서 결말까지 이르는 과정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특히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은 인물의 생각과 행동들이었다. 그래서 <하얀 성>은 처음과 결말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내 예상을 보란 듯이 비껴갔다.
처음에 '나'와 '호자'가 서로 신분을 바꿀 것임을 직감하자마자 나는 이 이야기가 두 사람의 우정을 다루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예상한 이야기는 이랬다: 호자와 '나'는 처음에는 주인과 노예 관계로 만났지만 이내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되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우정을 나눈다. 호자는 더 넓은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하지만 맡은 책무가 있어서 그러지 못한다. '나'도 하고 싶은 일들을 노예 출신이라는 신분 때문에 하지 못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비밀스럽게 신분을 바꾸기로 하고 서로가 되어서 살아간다.
그러나 실제로 <하얀 성>에서 호자와 '나'는 딱히 우정이라고 할 만한 것을 나누지 않는다. 오히려 두 사람은 서로 싫어하고 무시하고 혐오한다. 서로를 화나게 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서로를 비난하면서 기뻐한다. 이 점 때문에 이 이야기는 자꾸만 내 예상에서 빗나가곤 했다. 그래서 '나'와 호자의 이야기에 몰입해서 열심히 읽어 내려갔음에도 이 두 인물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물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이해하고 공감하다가도 예상치 못하게 이해할 수 없는 쪽으로 튀어 버려서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지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캐릭터가 조잡하다거나 이상하다는 건 아니다. 말 그대로 이해할 수 없을 뿐이다. 나와는 다른 사람인 것처럼.
그런데 이 두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나는 왠지 모르게 이 책을 읽으면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죽어라 싸우는 걸 보면서도 그랬고, 서로를 깔보고 화나게 하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서도 그랬다. 결국 '나'가 '그'를 사랑했다고 고백하는 장면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이 두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도 여전히 감동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 이야기에서 세부적인 내용과 캐릭터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하얀 성>은 서로 닮은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을 통해서 전개되는 소설이고, 그 긴장감 속에서 독자가 다양한 생각을 해 보면서 읽어 내려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책을 덮은 이후, 나는 '나'와 호자가 거울 앞에서 벌이던 일들을 떠올렸다. 서로가 닮았음을 부정하고 인정하는 과정들을 떠올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해 냈다. 내가 나와 닮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을 보면서 느꼈던 혐오감을. 그 사람들에게서 나 자신의 혐오스러운 면모들을 발견하고 느꼈던 불쾌감을. 그제야 그들이 왜 그토록 싸워대고 서로를 경멸했는지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자기혐오였다! 내가 나 자신을 미워하듯이 그들은 그들 자신을 미워한 거였다. 자기 자신으로 인해 화가 나 있었던 거였다.
그걸 깨닫고 나자 <하얀 성>은 곧 두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의 이야기가 되었다. '나'와 호자와 책을 읽는 나 자신. 우리 세 사람은 서로 닮아 있었다. 모든 인간들이 닮아 있는 것처럼. 이 이야기 속에서 '나'와 호자는 책상에 앉아서 서로의 죄를 적어 내려간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그 책상에 함께 앉아 있는 것처럼 나 자신의 죄를 떠올리곤 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그 장면에서 그렇게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인간은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 세 사람이 서로 닮아 있는 이유는,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이 서로 닮아 있는 이유는 우리가 지은 죄들이 비슷하기 때문인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며칠 전 이자람의 신작 판소리 <눈, 눈, 눈>을 보았다. 톨스토이의 단편 <주인과 하인>을 원작으로 한 창작 판소리였다. 프로그램북에 적힌 작가의 글에서 이자람은 말한다. 소설 속에 나오는 바실리가 내내 싫었다고. 자기 자신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이라서 싫었다고. 그래서 바실리가 자신과 닮은 사람임을 인정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말이다. 그 글을 읽으며 나는 <하얀 성>의 '나'와 호자를 생각했다. 그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서로를 깔보고 서로를 전혀 닮지 않았다고 여기던 순간들을 생각했다. 이 인물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해하던 나 자신을 생각했다. 사실은 우리는 모두 닮아 있었다.
*커버: Unsplash의 Anna Berdn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