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독서 챌린지, 열네 번째 책
<눈먼 시계공>은 진화론에 대한 책이지만, 진화론을 설명해 주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은 진화론을 변호해 주는 책이다. 이미 독자가 진화론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서, 대중들이 진화라는 개념에 대해 갖고 있는 선입견과 잘못된 상식을 하나씩 짚어가며 박살 내주는 책이다.
나는 <눈먼 시계공>의 서론을 읽을 때부터 익숙한 도킨스의 향기를 느꼈다. 그의 다른 책들에서 느꼈던 신랄함이 <눈먼 시계공>에서도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도킨스는 늘 화가 나 있는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만 같다. 늘 울분에 차 있고, 늘 분개해 있다. 그리고 늘 너무 시달려서 지친 듯한 시니컬함이 들여다보인다. 그런 도킨스 특유의 문장들이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웃기기도 했다. 이렇게 화를 내야 할 정도로 진화론을 의심하고 매도하는 사람이 많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읽다 보니 그의 날이 선 비판적인 태도가 좀 이해가 되긴 했다. 왜냐하면 나조차도 진화론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는 점을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킨스가 이야기하는 '진화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대중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나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 반대해."라거나 "불확정성 원리가 틀렸다고 생각해."라고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 이론을 이해하기가 어려우니까. 하지만 진화론은 비교적 쉽고 간단해 보이는 이론이기 때문에 누구나 진화에 대해서는 쉽게 말을 얹을 수 있는 것이다.
<눈먼 시계공>에서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낯익은 도킨스스러움은 바로 기가 막힌 비유들이다. 나는 글 잘 쓰는 과학자의 필수 조건 중 하나는 비유를 잘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도킨스는 정말 명확하고 깔끔한 비유들을 계속해서 꺼내 놓는다. 예를 들면 청사진과 요리법의 비유 같은 것. 유전자는 생명체의 청사진이 아니라 요리법이라는 정말 이해하기 쉽고 잘 맞아떨어지는 비유를 어떻게 생각해 냈는지 신기하다. 그 외에도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끊임없이 비유들이 등장하는 걸 보면서 감탄했다. 이런 걸 보면 나는 과학자도 아니고 작가도 아닌데도 괜히 질투가 난다. 이런 능력을 나도 갖고 싶어서.
한편 <눈먼 시계공>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 중 하나는 요즘 내가 읽는 책들이나 보는 영화, 듣는 음악들이 묘하게 공통된 주제를 품고 있는 듯하다는 거였다. 바로 전에 읽은 <소셜 애니멀>이나 최근에 본 <플로우>, <썬더볼츠*>와 같은 영화들은 '함께'라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들이었다. <눈먼 시계공>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가치를 느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유전자 단계에서부터 협동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점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생명의 생존 방식이 의도된 거라거나 미리 설계된 거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 책은 수십, 수백 장에 걸쳐서 그런 이야기를 했으니까.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것들의 협업을 통해서 만들어진 다양한 것들의 협업을 통해서 존재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과학적인 시선이 아니라 인문학적인 시선에서 이 점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어쩌면 요즘 내가 '함께'라는 가치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저런 감상들이 나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왜 '함께'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 '함께'를 더 많이 만나게 될까? 기대해 본다.
*커버: Unsplash의 Min Square_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