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독서 챌린지, 열여덟 번째 책
먼저 이 말부터 해야겠다. 나는 조금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트라우마 치료에 대해 더 잘 알고 싶었다기보다는 영화를 더 재밌게 보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골라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히어로 영화를 볼 때 말이다. 얼마 전에 마블 영화를 몇 편 다시 보았는데, 히어로들의 정신 상태가 그다지 건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제각각의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마침 집에 이 책이 있었다. 내가 산 건 아니고 누군가에게서 선물 받은 책이었는데, 트라우마 치료와 관련된 책이길래 이걸 읽고 나면 영화를 볼 때 눈에 보이는 게 더 많고 깊을 것 같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가벼운 동기로 <몸은 기억한다>를 읽기 시작했지만 책장은 결코 가볍게 넘어가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힘겹게 책을 읽어야 했다. 다루고 있는 트라우마라는 주제 자체가 무겁고 진지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책은 실제 트라우마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여러 증상과 치료법을 소개하고 있어서 더더욱 읽기 괴로웠다. 전쟁, 아동 학대, 성폭행, 자연재해 등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는 여러 요인들에 대한 통계 자료를 보는 것도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읽는 동안 우리가 트라우마라는 용어를 일상 속에서 너무 남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하게 되기도 했다. "아, 트라우마 생길 것 같아."라는 식으로 가볍게 쓰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트라우마에 우리 사회가 대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치료가 아니라 예방이라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이미 발생한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면 트라우마 아동에게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는 것과 동시에 아동 학대나 아동 성폭행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
이런 생각이 들자 내 머릿속은 다시 히어로 영화 생각으로 돌아갔다. 얼마 전 본 <캡틴 아메리카: 브레이브 뉴 월드>에 등장하는 새로운 캡틴 아메리카, 샘 윌슨은 PTSD 상담사 출신이다. 그 자신도 참전 군인으로서 트라우마 사건을 겪었고 전역 이후에는 보훈처에서 상담사로 일하면서 여러 사례들을 접해봤을 설정의 캐릭터인데, 그래서인지 샘 윌슨은 유독 대화와 공감을 통해 상황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전작인 <팔콘 앤 윈터솔져>에서도 마찬가지로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과 다시는 똑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를 개선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어쩌면 그게 우리 시대의 히어로가 취해야 하는 태도인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함께 들었다.
얼마 전 나는 친구와 함께 스쿠버다이빙 체험을 다녀왔다. 물에 들어가기 전에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장비를 착용하고 물에 들어가자 극도의 공포심이 몰려왔다. 그 정도로 심하게 패닉한 건 처음이었다. 이런 걸 공황 발작이라고 부르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결국 나는 체험을 포기하고 도중에 물에서 나와야 했다. 물 밖에 앉아서 호흡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 나는 무엇이 나를 이렇게 패닉하게 만들었을까를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물에 빠졌다거나 관련된 안 좋은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소에 수영도 잘하는데 왜 그렇게 무서웠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내 몸에 대한 통제권을 잃는 것을 내가 정말 두려워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안경을 쓰지 않고 고글을 쓰니 앞이 보이지 않았고, 물속은 어두워서 더더욱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웠고, 오리발 때문에 물속에서 몸을 가누기 힘들었고, 장비가 무겁고 가슴과 복부를 꽉 조여서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이 모든 요소들이 모여서 '내가 내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라는 기분을 느끼게 했고 그게 패닉의 원인이었던 것 같다.
트라우마의 원인을 알고 나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인다고 한다. 내 경험은 <몸은 기억한다>에서 본 예시들에 비하면 턱없이 사소한 것이었지만, 원인을 파악하고 나니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대강 감이 잡혔다. 운동이나 요가를 통해 내 몸에 대한 통제감을 높여본다거나 스쿠버다이빙을 시도하기 전에 수영을 충분히 해 본다거나 그런 것들. 아니면 단지 취미에 불과할 뿐이니까 굳이 다이빙을 하지 않고 스노클링 정도로 만족할 수도 있을 거고.
인상 깊게 읽었던 이 책의 마지막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공중 보건 분야에서 현재 가장 시급한 문제는 트라우마이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알고 있는 사실대로 행동할 것인지는 이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 <몸은 기억한다> 중에서.
*커버: Unsplash의 NE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