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Feb 01. 2023

[D-334] 내가 버스를 타려고 뛰지 않는 이유

32번째 글

나는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을 향해 뛰는 사람이 아니다. 버스 시간이 애매할 것 같으면 그냥 보내고 다음 버스를 탄다. 지하철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려도 승강장으로 뛰어 내려가지 않고 다음 차를 기다리며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물론 급해서 뛰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나는 그냥 버스나 지하철을 놓치는 사람이다. 눈앞에서 버스가 출발하려 한다고 해도, 급하게 달려가기보다는 보통 그냥 보내 주는 편이다.


내가 이런 여유를 갖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내가 체력이 부족해서다. 그래서 급하게 뛰고 싶지가 않다. 버스를 따라잡기 위해 달렸다가는 숨이 턱까지 차서 한참을 헐떡거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스에 무사히 올라탄다고 해도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다. 무거운 몸과 아픈 다리, 지친 마음을 안고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고 버스에 올라 있는 것보다는 마음 편히 정류장에서 기다리다가 다음 버스를 타는 것이 더 좋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늘 안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버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보면 버스를 꼭 타야겠다는 생각보다 '뛰어도 못 탈 것 같아.'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괜히 뛰었다가 힘만 빼고 버스도 놓치게 될까 봐 두려워서 나는 차선책을 선택한다. 나는 안전한 것이 좋다. 실패에 대한 리스크를 안고 가기보다는, 조금 더 늦어지더라도 안전한 선택을 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세 번째 이유는 다음 버스를 타도 시간적으로 괜찮아서이다. 내가 이렇게 버스를 놓치기로 선택할 수 있는 이유는 그다음 버스를 타도 제시간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약속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한다. 그래서 늘 조금씩 일찍 나오는 편이다. 일찍 출발하기 때문에 시간적 여유가 생기고, 지금 지나가고 있는 저 버스를 반드시 타야만 하는 이유가 사라진다. 조금 기다렸다가 다음 버스를 타도 충분하기 때문에 나는 굳이 뛰어가지 않는다.


마지막 네 번째 이유는 내가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에 가깝다. 내가 정말 감사하게도, 버스가 자주 오는 도심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보통 다음 버스가 5분-10분 이내에 오기 때문에 나는 '이 시간 정도면 그냥 기다리지 뭐.'라고 생각하며 마음 놓고 여유를 부릴 수가 있다. 만약 버스가 1시간에 한 대씩 왔다면 이런 사치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운 좋게도 버스가 자주 다니는 곳에 살고 있다. 그리고 요즘은 다음 버스가 언제 올지를 지도 앱과 정류장의 전광판으로 친절하게 잘 알려준다. 그래서 내가 '6분 뒤에 다음 버스가 올 테니 굳이 뛰지 말자'는 선택이 가능해진다. 잘 포장된 도로와 규칙적으로 짜인 버스 노선, 다양한 인프라가 갖추어진 곳에서 태어나 살고 있다는 점 덕분에 나는 감사하게도 여유를 부릴 수가 있다.


내가 이렇게 버스나 지하철을 앞에 두고 뛰지 않는 사람이 된 데에는 나의 약점과 단점, 나의 장점, 그리고 나의 운과 세상의 도움이 모두 작용하고 있다. 현재의 내 모습과 내 인생을 만들어 나간 것은 이런 요소들이다. 나 혼자만의 것도 아니고, 꼭 나쁘거나 좋거나 한 것도 아니다. 나는 단지, 나를 둘러싼 사회 속에서 살아가며 나만의 개성을 갖고 살아간다.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어 준 여러 가지 요소들 속에서.



/

2023년 2월 1일,

버스에 앉아서 안내 방송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Ant Rozetsky from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D-335] 스스로를 칭찬해 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