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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Feb 09. 2023

[D-326] 즉흥적일 수 있다는 것

40번째 글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고 한다. 첫 번째 유형은 여행을 떠나기 전에 아주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다. 어디를 갈지, 어떻게 갈지, 무엇을 먹고 무엇을 할지를 30분 단위로 세세하게 계획해 두는 사람들. 그리고 두 번째 유형은 큰 계획만 세워 두고 떠나는 사람들이다. 교통편과 숙소만 예약해 두고, 나머지는 일단 여행을 가서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는 이 두 가지 유형 중에서 100% 전자다.


나는 보통 여행을 가기 전에 모든 계획을 쫙 세워 둔다. 날짜별, 도시별, 활동별로 분류해서 계획을 다 짜 놓고, 그 계획이 틀어질 것을 대비해서 플랜 B와 플랜 C도 준비한다. 예를 들어 어떤 음식점에 가기로 정했다면, 만약 그날 그 음식점이 갑자기 문을 닫았다거나 사람이 너무 붐벼서 못 들어가게 되는 경우를 대비해서 근처에 다른 음식점을 두세 개 정도 더 찾아 둔다. 그래서 계획이 틀어져도 당황하지 않고 바로 다음 계획으로 변경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는 거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엑셀과 PPT는 필수다. 일단 엑셀로 가볼 만한 장소와 해볼 만한 액티비티 등을 유형에 따라 정리해야 한다. 각각 특징과 장단점을 적어 두고 예상 별점으로 순위를 매기고 계획을 짠다. 그리고 나면 엑셀로 시간표를 짜 둔다. 플랜 B와 플랜 C까지 포함해서 여러 개를. 그리고 나면 PPT를 만드는데, PPT는 여행을 다니는 중에 핸드폰으로 편하게 볼 수 있도록 지도, 사진, 계획, 설명 등을 정리해 두는 용도이다.


물론 지금은 이렇게 꼼꼼하게 챙길 체력도 시간도 없는 데다가, 언제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어서 좀 내려놓게 되었다. 그래서 요새는 전보다는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여행을 다니는 편이다. 계획을 안 세우는 건 아니지만, 예전처럼 계획을 빈틈없이 세우기 위해 애쓰지는 않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렇게 계획에 집착하는 사람인 것처럼 적어 두긴 했지만 사실 나는 즉흥적인 사람들이 부럽다. 즉흥적이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이 용감해야 한다. 잘 모르는 곳에 별다른 계획 없이 가 볼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즉흥적인 여행을 할 수가 있다. 나처럼 겁이 많은 사람은 계획이 없으면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하는데, 용기가 있고 넉살이 있는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비행기 티켓과 여권만 들고서 훌쩍 언어도 통하지 않는 외국으로 떠난다.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정말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그리고 즉흥적일 수 있다는 것은 마음의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과정과 결과를 걱정하며 초조하고 불안해하기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안 좋은 일이 생길까 봐, 또는 무언가를 놓칠까 봐 걱정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여유가 있다는 것.


또 이렇게 즉흥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실행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즉석에서 결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즉흥적인 사람들은 실행력은 물론이고 순발력과 재치도 갖추고 있다. 계획이 없어도 순간적으로 빠르게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판단해서 임기응변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엄청난 순발력과 상황 판단 능력을 갖춘 것이다.


즉흥적인 유형의 사람들은 반대로 계획적인 유형의 사람들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내가 그들을 부러워하듯이 말이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고, 원래 사람들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더 많이 원하게 되니까.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즉흥적일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 지금의 나처럼 체력과 시간이 부족해서 반강제로 무계획적인 사람이 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즉흥적이었던 사람들은 인생을 훨씬 더 충만하고 여유롭게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나를 조금 더 내려놓을 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순간의 소중함을 더 깊이 깨닫고 매 분 매 초를 충실하게 즐길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 마치 재즈 연주를 하는 것처럼 내 삶을 즉흥적으로 연주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

2023년 2월 9일,

식탁에 앉아서 언니가 틀어 놓은 유튜브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Marcelo Toro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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