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슬로 Feb 26. 2023

[D-309]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57번째 글

<해리 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마법 생물들 중에는 '보가트'라는 것이 있다. 보가트는 침대 밑이나 옷장 속처럼 어두운 곳에 숨어 있다가, 사람과 마주치면 그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로 변해서 겁을 주는 생물이다. 그래서 극중에서 보가트는 해리 포터의 앞에서는 디멘터로 변신해서 나타나고, 론 앞에서는 커다란 거미로 변신해서 나타나고, 늑대인간인 루핀에게는 보름달로 변신해서 나타나고, 네빌에게는 무서운 스네이프 교수님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나타난다. 각자 저 대상들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가트와 맞닥뜨린 캐릭터들 중 인상적이었던 것은 헤르미온느였다. 헤르미온느는 보가트와 마주쳤을 때 낙제했다는 소식을 전해 주는 맥고나걸 교수님을 보게 된다. 헤르미온느가 가장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낙제를 하는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미라나 거미, 뱀, 무서운 괴물 같은 것들을 가장 두려워하던 것과는 달리. 헤르미온느의 보가트는 훨씬 더 현실적이고, 그래서 훨씬 더 상대하기 어렵다. 헤르미온느는 결국 보가트를 퇴치하지 못하고 패닉에 빠진 채 뛰쳐나오고 만다.


만약 내가 보가트를 마주치게 된다면 어떤 것을 보게 될지 궁금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내 보가트는 아마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너에게 실망했어'라고 말하는 모습이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엄마와 아빠, 언니,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 내 소중한 친구들, 내 동료들과 지인들이 나를 둘러싸고는 실망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정말 실망스럽다.'라고 말하고, 뒤돌아서서 나를 떠나가는 것. 그것이 내 보가트일 것 같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것이 정말 두렵다.


얼마 전에 끔찍한 악몽을 꾼 적이 있다. 중요한 회의와 발표가 있는 날 늦잠을 자버리는 꿈이었다. 그냥 늦게 일어난 것도 아니고 저녁때가 다 되어서 눈을 뜨고 말았다. 꿈속에서 나는 일어나자마자 허겁지겁 시간을 확인하고 수십 개의 메신저와 전화가 핸드폰에 남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빨리 뛰기 시작했고, 너무 당황해서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상황을 수습해 보려고 다급히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 모두 소용없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을 망쳐버리는 악몽을 꾸었다. 최근에 내가 꾼 악몽들 중에서 가장 지독하게 끔찍한 꿈이었다.


나는 이런 것이 두렵다. 내가 맡은 바 책임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그래서 오로지 나 때문에 무언가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을, 그래서 내 평판이 떨어지고 신뢰를 잃어버리는 것을,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내게 실망하게 되는 것을. 이것이 나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 나는 그 누구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 나는 내가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누구에게도 나 자신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오직 나 자신에게만 나를 보여주면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비록 아는 것과 실제로 내 삶에 적용하는 것이 달라서 진심으로 그 사실을 믿고 살아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안다. 애써 나를 증명하려고 쩔쩔매지 않으려고, 그 에너지를 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려고 노력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는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것이 너무나도 두렵다.


나의 보가트를 어떻게 극복해 낼 수 있을지, 아직 방법을 찾아보는 중이다.



/

2023년 2월 26일,

카페에 앉아서 웅성거리는 소음을 들으며.



*커버: Image by Sam Jotham Sutharson from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D-310] 솔직함과 무례함은 다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