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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r 07. 2023

[D-300] 무너지는 성벽을 상상하다

66번째 글

며칠 전부터 어떤 이미지가 나를 사로잡고 있다. 머릿속에 계속 이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때때로 이 이미지를 상상하게 된다. 바로 성벽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이미지다. 무너지고 부서지는 높은 성벽,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흙먼지, 파도치듯 흘러내리는 돌무더기, 귀를 찢을 듯한 굉음, 폐허가 된 성벽의 잔해. 그 광경이 마치 영화 속 이미지처럼 편집되어서 실제로 보고 있는 것처럼 머릿속에 떠오른다. 


무슨 계시를 받았다거나 환상이 보인다거나 그런 이야기는 아니다. 어떤 종교와도 무관하고 실제로 헛것을 보는 것도 아니다. 우울증이나 다른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 이미지가 그저 나의 상상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어디까지나 내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영화를 보다가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장면을 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몇 날 며칠 동안 그 장면을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그저 지금은 이 무너지는 성벽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거듭 떠오를 뿐이다.


가끔 이럴 때가 있다. 나는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고 실제로도 상상을 일상적으로 많이 한다. 또 내게는 꽤나 사실적이고 생생하고 디테일하게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흰 바탕에 검은 글씨로 적힌 짧은 단어 하나만 읽어도 곧바로 영상이 머릿속에서 재생이 된다. 예를 들어 '사과'라는 글자를 본다면, 나는 이미 그 글자를 보는 순간, 사과의 색깔과 형태, 향기, 촉감은 물론이고 그 사과를 베어무는 어떤 입술의 이미지와 사과를 잘게 부수며 움직이는 앞니와 과수원의 나무에 매달려 있는 잘 익은 탐스러운 사과와 땅으로 떨어지는 사과를 바라보는 뉴턴과 뉴턴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느라 햇빛에 눈이 부셔서 약간 눈을 찌푸리고 있는 얼굴까지, 이 모든 것을 0.01초 만에 전부 아주 생생한 영상으로 머릿속에 그려내고 있다. 이런 상상하는 습관 때문인지 때때로 어떤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게 된다. 아무런 맥락도, 의미도, 이유도 없는 뜬금없는 이미지들을 말이다.


지금 성벽을 상상하는 것도 비슷하다. 머릿속에서 성벽이 무너지는 내용의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오래되어서 이미 약간 폐허처럼 되어 있는 유적지 같은 성벽이다. 주변에 사람은 없다. 그래서 굉음만 들릴 뿐 비명소리는 없다. 성벽이 왜 무너지는지는 잘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전쟁이나 지진 같은 일 때문에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그냥 어떤 충격을 받아서 무너지고 있다. 성벽이 세워져 있는 땅이 산과 충돌해서 그런 것처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성벽은 무너지고 있고 성벽 위로 파랗게 깔려 있던 하늘이 흙먼지와 돌조각들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면서 점점 갈색으로 뿌옇게 변해 간다. 


나는 이 이미지를 왜 떠올리고 있는 것일까. 왜 하필 성벽일까.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실없는 생각일 뿐일까. 오랜만에 갖는 여유로운 밤 시간에, 무너지는 성벽을 상상하면서, 성벽을 상상하는 나 자신을 잠시 돌아보고 있다.



/

2023년 3월 7일,

거실에 앉아서 TV에서 재생되는 영화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Tom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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