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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r 08. 2023

[D-299] 오늘은 글이 잘 안 써지는 날

67번째 글

나는 지금 한 시간째 노트북 앞에 앉아서 빈 브런치 글쓰기 창을 띄워 놓고 딴짓을 하고 있다. 2023년, 매일같이 글을 써온 지 67일 만에, 오늘 처음으로 글을 쓰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하얗게 나를 기다리고 있는 빈칸을 오늘 안에 하나도 채우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다.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정리가 되지 않아서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은 글을 쓰지 못하겠다는 내용의 글을 쓰기로 했다. 나는 왜 지금 글을 쓸 수가 없을까. 왜 내 머리는 이렇게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연 생각들만 부유하는 것이며, 왜 이 생각들은 손가락 끝을 거쳐서 튀어나오지를 못하고 떠돌기만 할까.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지금 피곤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일단 어젯밤에 핸드폰을 하다가 좀 늦게 잤다는 원죄가 깔려 있다. 그리고 오늘을 아주 바쁘게 보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침부터 길게 회의를 했고, 오후에도 회의가 두 개나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해야 하는 일들도 계속 밀려들어서 정신없는 하루를 보냈다. 그래서 오늘 5시 정도부터는 약간 멍한 상태였던 것 같다. 그 멍한 기분이 아직까지 이어져서 논리적이고 말이 되는 글을 써낼 만큼 두뇌 상태가 정돈되어 있지 못하다.


그리고 글을 '멋지게' 써내고 싶은 욕심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글로 쓸 소재들은 쌓여 있다.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까 봐 메모장에 쭉 적어놓은 소재들이 몇십 개는 된다. 또 지금도 쓰고 싶은 내용이 두세 개 있다. 그중에서 어떤 내용을 먼저 쓸지 고민하는 시간도 내가 노트북 앞에서 흘려보낸 한 시간의 딴짓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뭘 쓸지 고민한 이유는 글을 아주 '본격적으로' 잘 쓰고 싶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이 말을 지금처럼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가 아니라 머리도 팽팽 잘 돌아가고 피곤하지도 않아서 아주 끝내주는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끝내주는 컨디션일 때 쓰고 싶다. 사실 지금도 정신을 차리고 각 잡고 앉아서 쓸려면 쓸 수도 있겠지만 그 '각 잡고 쓰기'를 하기에는 지금 내가 너무 피곤하고 의지도 없다. 그래서 최대한 덜 멋지게, 최대한 대충 쓸 수 있는 소재가 무엇인지 고민하느라 아직까지 헤매고 있다. 완벽주의적인 태도나 집착을 좀 버릴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직 내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고 있다. 이 태도를 고치는 데에는 아마 훨씬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할 듯 싶다.


또 한편으로는 그동안 내가 너무 '나'에 집중해서 글을 썼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매일같이 '나'에 대한 글을 쓰느라 나를 너무 오래 들여다봐서, 내 수많은 생각들이 뒤섞여 한데 엉겨 붙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애초에 이 1년간의 데일리 글쓰기 프로젝트가 나 자신을 좀 더 오래,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기 위해서였다는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다 보면 내가 너무 커져서 감당이 안 될 때도 있는 것 같다.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상태에 빠져 버리는 거다. 나를 내려놓으려고 하면 할수록 나를 붙잡게 되는 이치와 비슷하다.


이 생각을 하고 나니 문득, 뮤지컬 <나인>에서 주인공 귀도가 부르는 노래 'I Can't Make This Movie'의 가사가 떠오른다. "방향성을 잃은 채로 헤매고 있는 귀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귀도(Guido out in space with no direction, Guido at a loss for what to say)." 지금 내 상태를 이렇게 잘 표현해 주는 가사가 있다니.


오늘은 글이 잘 안 써진다. 오늘은 뭘 어떻게 해본들 도저히 멋진 글은 쓰지 못하겠는 그런 날이다. 하지만 글을 못 쓰겠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하는 것만으로도 오늘치의 글을 완성해 낼 수 있었다. 삶이 때때로 우리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굴러가게 만드는 것처럼, 내 글도 때때로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완성되기도 한다. 방향을 잃고 갈피를 잡지 못하겠는 오늘 같은 날에는 이렇게 일단 앉아서 손가락을 아무렇게나 놀리며 글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를 지켜보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다.



/

2023년 3월 8일,

침대에 기대앉아서 생활 속 소음들에 귀를 기울이며.



*커버: Image by Micha Sager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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