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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r 09. 2023

[D-298] 진이 빠지다

68번째 글

'진이 빠지다'라는 표현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쓰곤 한다. "오늘 하루종일 돌아다녔더니 진이 다 빠졌어." "진이 빠져서 도저히 더는 못 하겠어." 이런 식으로 기진맥진해졌을 때 쓰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 표현에 나오는 '진'이 무엇인지 갑자기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나무의 수액을 의미한다고 한다. 나뭇진, 진액이라고 할 때의 그 진(津)인 모양이다. 의욕이나 기운을 잃고 기진맥진해진 상태를 수액이 다 빠져나가서 말라 버린 나무에 빗댄 표현이었다.


'진이 빠진다'의 어원을 알고 나니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나의 '진'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 진이 빠진 나무는 점점 병들어 비실거리고 끝내 말라서 죽게 된다. 진은 나무의 생명력의 근원이다. 그렇다면 사람의 '진'은 과연 무엇일지가 알고 싶었다. 과연 무엇이 없을 때 사람이 말라 버석거리게 되는지. 더 개인적으로 파고들면, 과연 무엇의 부재가 나를 죽이게 될 것인지.


나의 진은 무엇일까?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것, 나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것, 내게서 빠져나가면 진이 빠지게 되는 바로 그것은 무엇일까?


고민해 본 결과, 이 질문에 두 갈래로 대답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일상 속의 작은 진과 내 생을 관통하는 큰 진으로. 우선, 진이 빠진다는 말을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듯이 그저 힘이 없고 기진맥진한 상태로 생각하고 대답한다면 나의 진은 '나 자신에게 신경을 써줄 수 있는 여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밖으로 발산할 때 진이 빠진다. 예를 들면 오래 야외 활동을 한다던지, 많은 사람들과 오랫동안 같이 있는다던지 하는 일들이 나의 기력을 소모한다. 내향형 인간이 이런 특징을 갖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 내가 내향형 인간이라 그런가 보다. 이렇게 에너지를 밖으로 꺼내 놓는 일들이 즐겁지 않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이런 일이 있고 나서는 충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충전을 위해서는 내 시선을 나 자신을 향해서 돌려주어야만 한다. 하루의 일정 부분은 나를 위한 개인적인 몫으로 남겨 두어야만 진이 다 빠져 버리질 않는다. 이를테면 지금 글쓰기를 하는 것처럼 나 자신을 돌볼 시간이 필요한 거다. 그리고 이렇게 나 자신을 돌보기 위해서는 여유가 필요하다. 몸과 마음의 여유 모두.


그리고 진이 빠진다는 말을 더 크게 확대해서 내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대답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나의 진은 '믿음'이라고 말이다. 나를 여즉 살아가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세상, 너무나도 많은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세상에서 내가 나의 삶을 계속 유지할 수 있도록 지탱해 주는 것은 믿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 비록 지금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괴로운 일들이 가득할지라도 언젠가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가리라는 믿음, 달라질 것이라는 믿음, 더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이 고난의 시대를 지나 우리는 결국 답을 찾아낼 것이라는 믿음, 이 세상은 아직 희망을 갖고 지켜볼 가치가 있다는 믿음. 이 믿음이 나를 계속 살아가게 한다. 만약 언젠가 이 믿음을 잃어버리게 된다면 나는 아마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게 될 것 같다. 진이 빠져서 그대로 말라 죽어버리게 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믿으려고 노력하고, 희망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진이 빠지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

2023년 3월 9일,

방 침대에 앉아서 거실에서 들리는 TV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Joe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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