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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r 13. 2023

[D-294] 내 인생의 엔딩크레딧

72번째 글

오늘은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던 날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7개 부문에서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가며 시상식을 휩쓸었고, 아시아인 최초 남우조연상 수상과 여우주연상 수상이라는 의미 있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지금 나는 낮에 챙겨보지 못한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를 뒤늦게 챙겨보는 중이다. 시상식을 보며 한 해 동안 열심히 일한 영화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상을 받은 것에 기뻐하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이 상을 받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면서 나는 지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내 인생이 영화라면, 그리고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다면, 그들은 수상 소감으로 어떤 말을 할까?


이런 상상을 하는 것 자체가 오만한 생각일 수 있지만 그래도 상상은 자유니까 한번 고민해 보는 중이다.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은 "이 재미없는 영화를 봐 주셨을 뿐 아니라, 이 영화에 투표까지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라는 삐딱한 문장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깎아내리는 일은 그만하기로 했다. 이런 말은 아주 높은 자존감과 아주 굳은 심지와 쉽게 상처받지 않는 아주 단단한 외피를 가진 사람이 블랙코미디스러운 유머를 던질 때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냉소하는 말을 떠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수상소감은 이렇다. "이 영화에 무한한 지지를 보내 주신 분들께 감사해요. 여러분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 영화를 싫어해 주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전자는 내게 힘이 되어 주고 사랑을 주고 나를 지지해 준 고마운 사람들에게 바치는 인사이다. 그리고 후자는 내게 괴로움과 시련을 준 사람들에게 표하는 감사다. 나를 무너뜨리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해서 나를 더 강하고 단단하게 만들어준 사람들에게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사랑해요." 왜냐하면 내 인생이 막을 내리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영화의 러닝타임 동안 나를 버티게 해 준 것은 사랑일 테니까.


누가 이 말을 하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 세계의 창조자나 의인화된 신 같은 존재? 말 그대로 나의 제작자인 부모님? 글쎄, 그보다는 아마 나의 또 다른 자아, 제 4의 벽을 넘어 존재하는 나의 자아가 말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내 인생을 만든 사람은 나 자신이니까. 이 나의 또 다른 자아는 감격에 겨워 펑펑 울지도, 활짝 웃으며 뛸 듯이 기뻐하지도 않고 차분하게 무대에 서 있다. 무대에 서서 미소를 띤 채 저 말을 하는 거다. 더는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강인하고 당당하게.


그렇게 내 인생의 엔딩크레딧을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 인생을 있는 그대로 영화에 담아내면서, 가감 없이 진솔하게 보여주면서 그렇게 수상소감을 말하고 싶다. 나의 인생을 거쳐 간 사람들에게 감사하면서 말이다.



/

2023년 3월 13일,

소파에 앉아서 아카데미 시상식 중계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Denise Jans from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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