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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r 25. 2023

[D-282] 쉬는 법을 잊어버린 듯해

84번째 글

어제 즐거운 금요일 밤을 보냈다. 오랜만에 긴장을 좀 풀고 나를 위해 온전히 시간을 썼다. 회사에서 준비하던 일 중 한 가지를 금요일 오후에 끝냈는데, 그 일이 끝나자 긴장이 확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일 때문에 아주 바쁘게 지냈으니 이제 좀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질 때가 된 것 같았다. 쉬면서 피로도 풀고 마음도 다스릴 수 있도록.


그래서 어젯밤에는 여유롭게 저녁을 먹은 뒤 소파에 편안하게 앉아서 TV를 보았다. 오랜만에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할까 싶기도 했지만 좀 피곤해서 독서나 게임처럼 능동적인 휴식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 그냥 TV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채널을 돌리다가, 마침 영화 채널에서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 <휴고>를 해 주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다. TV에서 틀어 주면 이미 질리도록 봤던 거라도 홀린 듯이 또 끝까지 다 보게 되는 영화들이 있는데 <휴고>는 그런 영화들 중 하나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영화, 그래서 영화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선물 같은 영화다.


편안하게 자리도 잡았겠다, TV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도 해 주겠다, 따뜻한 차 한 잔도 손에 쥐고 있겠다,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릴렉스할 수 있는 완벽한 조건이 다 갖추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이 조건들 속에서 낯섦을 느꼈다. 편안함이 아니라 낯선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렇게 쉬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어서 어색했다. 내가 쉬고 있다는 이 상황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쉬려고 계획했었으면서도, 과연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쉬어도 되는 건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쉬는 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편안한 상황 속에서 불편함과 함께 남겨진 채로 나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쉬는 법을 잊어버릴 정도로 열심히 살지는 말자는 생각을 했다. 열심히 살되, 이런 방식으로 열심히 살지는 말자고 말이다. 내 휴식, 내 잠, 내 건강을 빼앗아서 일에 밀어 넣어서는 안 된다. 이건 열정이 아니라 화재다. 장작이라고는 나 하나만을 덜렁 가져다 놓고 불을 붙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불타 사라지도록 말이다. 이건 결코 옳은 방식이 아니고, 내 미래의 체력을 미리 끌어다 써서 땜질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내 스스로 나를 닳고 해지고 녹슬게 만드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앞에서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 내가 좋아하는 자세로 기대앉아서 내가 좋아하는 차를 마시며, 나는 반성했다. 이 완벽한 조건을 갖추어 놓고도 즐기지 못하는 나를.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내가 내일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바빠지기 전, 몇 달 전부터 계획해 놓은 여행이다. 휴가도 미리 내 놓았고, 휴가를 가기 전에 중요한 업무도 하나 마무리해서 급한 불도 껐다. 이제 내게는 즐길 일만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2박 3일간의 여행을 한껏 즐길 것이다. 쉬는 법을 잊어버린 나를 위해서, 쉬는 법을 다시 배우기 위해서 말이다.



/

2023년 3월 25일,

침대에 엎드려서 노래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StartupStockPhotos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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