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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r 27. 2023

[D-280] 읽기로부터의 해방

86번째 글

나는 읽는 걸 좋아한다. 늘 뭔가를 읽고 있어야 한다. 화장실에 갈 때도 꼭 읽을거리를 챙기고, 출퇴근길 버스 안에서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읽는다. 그게 SNS 글이던, 카톡 메시지던, 전자책이던 상관없이 나를 무료하지 않게 해 줄 읽을 것이 필요하다. 만약 읽을 것이 없어서 그냥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고 있어도 어느새 창 밖으로 보이는 간판들과 표지판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이걸 활자 중독이라고 한다는 얘기도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자세히 알아보지 않아서 그 부분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습관적으로 텍스트를 읽는 사람인 것은 맞다. 딱히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고 읽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것도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정보를 빨아들이듯이 습관적인 읽기를 하게 된다. 게다가 나는 읽는 속도도 아주 빠른 편이라 스쳐 지나가는 텍스트도 읽어버리곤 해서 더 많이 읽게 된다.


이렇게 빨리 읽고 많이 읽고 습관적으로 읽는 일은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정보량을 의식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부분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이 끊임없는 읽기는 나를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고 눈과 머리가 계속 일을 해서, 피로한 상태가 계속 유지되기 때문이다. 길을 걸을 때조차 주변의 간판이며 안내문을 보며 쉴 새 없이 텍스트를 습득하고 있으니 피곤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래서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가면 피로가 덜하게 느껴진다. 한글이나 영어 알파벳으로 쓰이지 않은 간판, 내가 읽으려고 해도 읽을 수 없는 낯선 문자로 쓰인 메뉴 등 '읽을 수 없는' 텍스트에 둘러싸이게 되기 때문이다. 불편한 점도 물론 있고 소통을 위해서 추가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점도 피로감을 높이지만 적어도 시각적 피로는 훨씬 덜하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와 -를 따져 보면 피로의 총량이 줄어드는 느낌이다.


글자가 보이지 않아서 피로하지 않은 거라면, 평소에 피곤할 때는 안경이나 렌즈를 빼고 일부러 흐릿하게 보면 되는 게 아닌가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면 답답함이 해방감을 앞선다. 그리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불안감이 추가되어서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또 굳이 다른 문자를 쓰는 나라로 여행을 가지 않아도 그냥 숲이나 산처럼 글자가 아닌 풍경에 둘러싸이면 되지 않나 싶을 수도 있다. 실제로 이건 어느 정도 비슷한 감각이 느껴지긴 한다. 하지만 풍경을 하루 종일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등산을 가서 멋진 경치에 감탄하다가도 잠시 후에는 내려와야 하고 밥을 먹어야 하는데, 거기서부터는 다시 한국어 표지판과 한국어 간판과 한국어 메뉴판이 내 눈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길게 휴식을 취하기가 어렵다. 여러 가지를 따져 보았을 때, 낯선 문자를 사용하는 나라로 떠나는 것이 상책이다. 그래서 일상에서도 잠시 벗어나고, 한글 텍스트로부터도 잠시 벗어나서 해방감을 맛보는 거다. 여행에서 여러 다양한 경험을 하느라 바빠서 무료함을 느낄 새 없이, 그래서 또 다른 읽을거리를 찾아다닐 필요 없이 하루를 보낼 수 있어서 더 좋다. 그만 읽을 수 있다는 점.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많은 이유들 중 하나다.



/

2023년 3월 27일,

호텔 침대에 엎드려서 낯선 언어의 TV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Felix Wolf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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