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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 Mar 29. 2023

[D-278] 나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게 되기까지

88번째 글

며칠 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런 말이 나왔다. 나이가 들수록 나에 대해서 더 정확한 진단을 내리게 되는 것 같다고 말이다. 나와 점점 더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내 몸과 내 마음을 꽤 오랫동안 끼고 살다 보니, 점차 경험이 쌓여서 더 정확한 진단을 내리게 되는 거다. 어떤 분야를 오래 연구한 전문가는 간단한 실험 데이터만 보고도 어떤 상황인지를 금세 파악해 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분야에 갓 입문한 초보자는 처음 겪는 일도 많고 경험이 부족하다 보니 당황해서 우왕좌왕하기도 하고 한참을 고민하고 연구해야 진단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전문가는 다르다. 전문가는 훨씬 더 많은 케이스를 겪어 보았기 때문에 훨씬 더 뛰어난 분석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전문가는 잠깐 본 것만으로도 초보자보다 더 정확한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전문성과 연륜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내 상태를 훨씬 더 빨리 파악하고, 훨씬 더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9살짜리 어린아이 시절의 나라면 배가 아픈 상황에서 '왜 배가 아프지?'라고 생각하며 끙끙 앓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배가 아프면 '아,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는데 저녁으로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 배가 아픈가 보다.'라거나 '내가 우유가 좀 안 받는 체질인데 아까 카페라떼를 마셔서 배가 아프구나.'라고 금세 진단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나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배가 아픈 상황을 미리 예방할 수도 있다. 환절기에 컨디션이 떨어져 있을 때는 소화기능도 떨어진다는 것을 알기에 기름진 음식을 피할 수 있고, 우유가 잘 안 받는 것을 알기에 라떼 대신 아메리카노를 고를 수 있는 것이다.


또 정확한 진단을 내리는 것은 올바른 해결책을 향해 가는 첫걸음이다. 그래서 미처 예방하지 못하고 좋지 못한 상황에 놓였더라도 진단을 잘 내렸기 때문에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도 비교적 쉽게 알아낼 수 있다. 어린 시절의 내가 배가 아플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라서 배를 쥐고 끙끙대기만 했다면, 지금의 나는 배가 아프면 미지근한 물을 좀 마시고 천천히 걸으며 속이 좀 편해지도록 해볼 수 있다. 또는 이런 경우에 화장실을 한 번 갔다 오면 속이 가라앉는 것을 알기에 그냥 침착하게 기다릴 수 있다.


이렇게 나에 대한 더 나은 분석력과 판단력을 갖추게 되기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수십 번, 수백 번 배가 아팠었기 때문에 나는 이제 내가 왜 배가 아픈지, 어떻게 하면 배가 안 아플 수 있는지, 배가 아플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내가 지나온 모든 길과 내가 겪은 모든 일들과 내가 받은 모든 상처들이 이런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내가 정말로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한 순간의 경험이나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고 싶었던 경험도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내는 데에 기여했다. 그래서 나는 과거의 일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서 이야기하듯이, '내가 겪은 모든 거절과 실망이 나를 지금 이 곳, 지금 이 순간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

2023년 3월 29일,

책상에 앉아서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를 들으며.



*커버: Image by Konstantin Kolosov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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