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쉬운 자식을 맡습죠!
최근에 우리 집에 거대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건 갱림여사님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할 만한 굵직한 일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로 갱림여사님은 틈만 나면 '자식들 걱정 안 시키고 씩씩하게 할 거야'라는 말을 입이 마르고 닳도록 했다.
나랑 통화하다가도
"엄마 별일 없어?"
"걱정마라. 너네 걱정 안 시키고 씩씩할게 살 거야."
통화 맺음말은 핸드폰에 저장해놓은 것처럼 자동으로 나온다.
자식들 걱정 안 시키고 씩씩하게 살 거라는 갱림여사님의 큼직한 다짐에도 불구하고 지난 토요일에 일이 터졌다. 가족 사칭 스미싱 피싱을 당한 것이다.
온 자식들이 다 걱정했다. 하다못해 집 근처 친척들도 다 몰려왔다. 다 걱정시켰다.
일을 마무리하고 나니 갱림여사는 돈도 돈이지만 찢어진 모토를 발견했다.
-씩씩하게 살 거야.-
앞엔 다 잘리고 뒤에 문장만 남은 모토였다. 갱림여사는 열불이 났다. 사건 발생 일주일 뒤 내가 불안한 목소리로 연락을 하면 이미 씩씩거리고 있는 수화기 너머의 갱림여사님.
"걱정 말라고! 이제 멍청이같이 안 당할 거라고!"
"그 상황이 속인 거지 엄마 멍청이라고 하는 거 아니라니까!"
나도 소리를 빽 질러보지만 마음이 편치 않다.
"네가 아빠 몫한다며!"
마음이 속상하면 나오는 갱림여사님의 말이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1년은 온 가족이 마음고생이 너무 심했다. 배우자를 하늘에 보낸 엄마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는 없어 부모를 잃은 슬픔보다 엄마의 슬픔을 먼저 어루어 만졌다. 갱림여사가 너무 슬퍼하니까 나는 아빠의 빈자리를 내가 채우겠다고 했다. 셋째의 당돌한 말이었다.
사춘기 땐 엄마랑 자주 싸웠다. 우리 갱림여사 성질머리 감당할 사람은 아빠밖에 없었다. 어릴 적 내 눈에는 아빠는 주인공 엄마는 빌런이었다. 커서 보니 우리 엄마가 아빠 옆자리 지키는 것도 용하고 우리 아빠도 엄마 데리고 산 것도 용하다 느낀다. 갱림여사는 다른 걸 몰라도 의리는 끝내준다.
하여튼 엄마랑 싸우고
"밥 안 먹어!"라고 아빠한테 속상한 말 뱉고는 방 안으로 휙 들어가면 엄마는 알은체도 안 하지만 아빠는 조용히 문 열고 들어와서 밥 먹으라고 재촉한다. 나는 아빠 속이 더 상하게 집 앞에서 토스트를 사고 와서 먹는다.
하늘이 그때 사춘기 벌을 나이 서른에 내렸는지 이젠 내가 아빠 역할을 맡아야 한다.
언니는 나이 서른 하나 먹고 엄마랑 싸워서 집도 나가보았고 애 둘 있는 장가 간 오빠도 엄마가 일을 그르치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른다. 나도 자식이지만 엄마의 속상한 마음을 풀어주는 자식이다. '언니가 그런 마음은 아니잖아~ 오빠도 목소리만 크고 내심 다 엄마 생각하지~'
물론 거짓말을 꾸며내서 하는 말은 아니지만 나도 가끔은 엄마가 미워서 소리를 빽빽 지르고 싶고 문도 쾅 닫고 내가 화난 티를 마구 내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나는 아빠처럼 있기로 했다.
아빠라면 엄마가 싫은 말을 해도 끝까지 들어줄 것이고
엄마가 성질부려도 마음이 여린 사람인 걸 알고 제 성질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줄 것이다.
가끔 엄마가 이상한 소리를 해대도 어이없다는 듯이 웃고 넘길 것이다.
엄마가 위기에 봉착한다면 온 수단을 써서라도 그 상황에서 엄마를 구할 것이고
엄마가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 할 것이다.
그래, 이미 엄마 마음은 화상을 입었는데 나까지 그 상처를 긁어서 되겠는가.
전 어려운 자식 되기는 글렀으니 쉬운 자식으로 남은 생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