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원단시장 방문기
지독한 몸살에 걸렸다. 병원에 가니 코로나는 아니라 하셨지만 몸의 감각이 코로나의 그것과 비슷했다. 오랜만에 맞는 링겔이었다. 이번 주 주말엔 공장 사장님께 샘플에 필요한 원단, 부자재를 구해드려야 한다. 푹 잔 후 새벽같이 투표를 하고 잠시 휴식했다.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지만 그래도 오늘 기필코 파우치에 필요한 재료들을 찾으리라 다짐하며 몸을 이끌고 신설동 원단시장으로 향했다.
내향형 인간에겐 사람에게 말 거는 것 자체가 챌린지다. 그리고 익히 들어본 원단시장에 대한 공포스러운 후기들로 발발 떠는 강아지처럼 원단 시장으로 향했다. 가방 원단을 많이 취급하고, 동대문을
가기 전 시도해 보기 좋을 것 같아 신설동부터 찾았다.
선거일이라 휴무날이긴 해도 몇 군데 열였겠지 싶어서 찾아갔는데 정말 몇 군데만 열었다. 연 곳에 들어가도 스와치 하나 얻지 못하고 왔다. 비닐봉지를 들고 몇 바퀴를 돌고 털레털레 걸으니 오늘 이대로 가면 잠을 못 잘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바로 버스를 타고 동대문으로 향했다.
텅텅 문을 닫긴 했어도 워낙 점포수가 많아 꽤 열린 곳이 있었다. 내가 다시 오면 여기를 찾아올 수 있을까? 싶은 미로 같은 구조라 외워도 까먹을 것 같아서 그냥 맘 놓고 막 돌아다녔다. 발수 원단 있어요?를 주문처럼 외우며 돌아다니고 한 곳에 스와치를 얻을 수 있었다. 스와치만큼 작고 얇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게 막 돌아다니다가 작고 깔끔한 점포 하나를 봤다. “발수되는 원단 있어요?”를 물어보면 보통 “없어요” 혹은 “취급 안 해요” 등의 답변이 돌아왔다. 여기는 달랐다. “방수랑 생활방수랑 발수랑 다 다른 표현이에요. 그렇게 물어보면 정확히 어떤 걸 바라는지 알기 어려워요. 어떤 걸 만드시는데요?” 정확한 표현을 알려주시는 눈빛에서 ‘여기다!’란 생각이 들었다. 파우치용 원단을 만드는데 위생용품을 넣을 파우치라 오염에 강했으면 좋겠고, 피부에 닿아도 부드러운 천을 찾고 있다 말씀드렸다.
사장님이 추천해 주신 두 가지의 원단을 받으니 내가 너무 원하던 촉감이었다. 혹시 오늘 가져갈 수 있는 원단이 있냐고 여쭤보니 가장 마음에 드는 원단이 1yd씩 있다고 해주셨다. 결제를 하려 할 때 초짜임을 티 내지 말자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카드를 들어버렸다. 머쓱했지만 사장님은 그냥 가져가라고 하셨다. 뭘 모르는 초짜임을 티 내서 그냥 먹고 떨어져라~라는 생각이셨대도 나는 그저 감사했다. 이 사장님께 꼭 주문하리라 생각하며 명함이 있냐고 여쭤봤다. (2차 초짜 모먼트) 웃으시며 스와치에 다 나와있다고 하신다. 머쓱과 뻘쭘과 여러 감정이 스쳤지만 사실 감사함이 다 덮었다.
또 와야지, 샘플을 만든 걸 들고 또 와야지. 어떤 운은 꽁으로 들어온다. 적어도 나에게는 우연히 온 운보단 시작처럼 느껴졌다.
겉면 원단, 안감, 고무줄, 스펀지, 지퍼 등 원단 나머지에 필요한 것들도 차례대로 구했다. 이 원단을 받은 이상 무조건 파우치로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에 펄펄 기운이 났다. 집에 와서 녹초가 됐지만 마음은 차올랐다.
이제 공장 사장님께 전달드릴 작업 지시서를 작성하고 샘플에 필요한 재료들을 전달해 드리고 샘플이 나올 때까지 브랜드의 로고, 라벨 등을 정할 차례다. 그냥 다음 내딛을 계단만 보고 올라가자는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