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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Oct 01. 2020

삶은 이미 내가 바랬던 모든 것을 주었다

Life has given me everything I asked for

후덥지근한 여름 날씨가 지나가고 어느새 가을이 성큼 다가온 날이다. 시원한 바람이 반갑다. 차창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헝클어지는 머리를 쓸어 올리는 순간 갑자기 마음속이 환희로 가득 찼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생각.


"Life has already given me everything I asked for."

삶은 내가 바랬던 모든 것을 이미 나에게 주었다.


2년 전 이맘때쯤 나는 미국 워싱턴 디씨 근교의 한 카페에서 늦은 밤까지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매일 퇴근 후 아이들의 저녁을 챙겨준 뒤에 근처의 카페에 가서 일을 하곤 했는데 이제 막 시작한 남편의 사업을 도와주느라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날이 한 달에 절반은 되었던 것 같다. 늦게까지 일하면서도 불만은 없었다. 그저 사업을 제대로 일으켜 보려 고분군투하는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뿐. 그리고 제대로 보살펴 주지 못해도 나름 행복하게 잘 지내는 듯한 아이들에게도 고마운 마음뿐.


당시의 남편과 나는 남편의 새 사업을 잘 키워서 앞으로 좀 더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꿈을 꾸느라 그랬는지 아니면 일에만 집중해서 그랬는지 몸이 힘들어도 마음은 괴롭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괴로운 마음이 없다고 해서 특별히 즐거운 것도 아니었다. 종종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 조용히 쉬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어떤 날은 퇴근길에 문득 하루 중 운전하는 이 시간만이 혼자 아무것도 안 하고 고요히 있을 수 있는 시간이구나하는 생각이 떠올라 회사가 멀어서 출퇴근 시간이 1시간이나 되는 것이 감사하기까지 했다.


남편의 사업이 계획대로 잘 진행된다면 직장을 그만둘 생각이었다. 몇 년만 둘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면 일찍 은퇴해서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에게 있어서 돈은 자유를 의미했다.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때에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는 자유.


그렇지만 어디 삶이 계획한 대로만 가겠는가. 우리의 삶은 2년 전 우리가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우리는 지금 제주도에 와 있고 그동안 남편은 사업을 접었다. 잠시 한 학기만 쉬어가자 했던 것이 쉬면서 지낸 시간이 1년이 넘었고 갑작스러운 코로나와 남편의 건강상 문제로 인해 나는 복직을 1년 더 미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는 앞으로의 삶을 예측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예상한 대로 흘러간 것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놀라운 것은 지금 이 삶이 우리가 계획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삶이 그 스스로의 방식으로 우리가 원했던 모든 것을 이루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나는 오늘, 바다내음 짭짤한 제주도의 가을바람을 맞으며 문득 깨달았다.


요즘 우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쉰다. 매일매일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 보낸다. 매일 아침 아름다운 자연의 제주 해안을 함께 걷고,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커피숍 창가에 앉아 맛과 향이 최고인 커피를 마시고, 좋아하는 연재만화들을 매일 빠지지 않고 보고, 어떤 때는 하루 종일 귀여운 고양이 유튜브도 맘껏 본다. 코로나 전에는 아이들과 주변 도시로 여행도 자주 다녔고, 코로나 후에도 훌쩍 근교 자연으로 종종 떠난다. 가끔 이메일도 쓰고 책도 읽고 글을 쓰는 등의 생산적 이어 보이는 일을 할 때도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시간은 그냥 빈둥대며 보낸다. 그런데 마음껏 빈둥대도 괜찮을 만큼 자유롭다.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언제까지 꼭 마무리 지어야 할 일도 없으니 매일매일이 자유롭고 즐겁다.


그러고 보면 애초에 돈을 원했던 이유가 이런 자유를 갖기 위함이었으니 돈을 벌진 않았지만 결국 내가 원했던 것이 이루어진 셈이다. 내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로운 삶을 이미 내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삶은 이미 내가 원했던 모든 것을 주었다. 이미 나의 소원이 이루어졌고 나의 삶은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 오늘, 어느새 성큼 다가온 가을의 시원한 바닷바람이 나에게 알려준 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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