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보선생 Oct 07. 2020

한국에선 미니멀 라이프가 쉽지 않다

어울려 사는 속에서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제주에 오면서 자연스럽게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게 된 나는 가지고 다니는 가방이 딱 하나가 있다. 가벼운 천으로 만들어진 데다가 편리하게도 앞면에 적당한 사이즈의 주머니가 두 개 달려 있어 핸드폰과 카드 지갑을 넣고 다닐 수 있는, 흠잡을 데가 없는 가방이다. 가방이 하나이기 때문에 소중함이 각별하다. 가방이 두 개면 소중함이 반으로 줄어든다. 가방이 많을 때는 가방이 소중한 줄 몰랐다. 들고 다니는 가방이 하나뿐인 삶은 가볍다. 많은 가방 중에서 무엇을 들고 나갈까 고민하는 삶의 무게가 덜어졌다.


한국에 살면서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한국에선 주고받는 게 많다. 주고 나면 뭔가가 자꾸 돌아온다. 먼저 주지 않아도 자꾸 받는 일이 생긴다. 고마운 일은 꼭 갚고 싶고 좋은 것은 나누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일 거라 이해는 하지만 원치 않는 물건을 받을 때면 주는 행위가 받는 사람의 기쁨을 위한 것인지 주는 사람의 만족을 위한 것인지 헷갈린다.


작은 방 책장 오른쪽에 지나다니며 보일 때마다 늘 마음이 쓰이는 물건이 있다. 사용하지 않을 물건은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처분하는 요즘이지만 이 물건은 버릴 수가 없다. 손재주가 뛰어난 나의 오랜 친구가 좋은 실을 구해서 세련된 디자인으로 직접 떠 준 작은 가방인데, 언젠가 이 가방을 유용하게 사용해 줄 주인이 나타나면 건넬 요량으로 깨끗한 종이가방에 넣어 두었다. 가방이 멋스럽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친구의 마음이 담긴 소중한 선물이라서 버릴 수가 없다. 나에게 그 선물을 건넸을 때의 마음을 알기에 아무에게나 줘 버릴 수도 없다. 어려운 문제다.


선물은 받은 것은 코로나가 갑자기 유행을 시작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소독용 알코올의 수요가 급증했던 때였다. 부산에서 네일 샵을 하는 그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소독용 알코올이 거의 다 떨어져 고민이라 했다. 그런데 우리 집 근처의 약국을 가 봤더니 부산에서 그리 구하기 힘들다는 에틴 알코올이 박스째 나와 있었다. 한 사람 당 살 수 있는 최대 개수라는 세 병을 사서 친구에게 택배를 부쳤다. 비상시를 위해 안 쓰고 꼼쳐 두었던 마스크도 두어 장 동봉했다. 친구 집 근처의 약국에선 공적 마스크마저 일찍 떨어져서 늦게 가면 못 사는 날이 많아 가진 마스크 하나를 아껴 쓰고 있다 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도착한 박스를 열어본 친구는 너무 감동했다고 했다. 고맙다고, 정말 잘 쓰겠다고. 이 정도면 한몇 달은 거뜬할 거라고 했다. 마음이 너무 좋았다. 나에겐 이렇게 쉬운 일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때 마음이 아주 좋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이니 기쁨이 두 배다.


이렇게 끝났으면 좋았을 일이었다. 하지만 주고 나면 뭔가가 자꾸 돌아온다 하지 않았는가. 친구는 며칠을 꼬박 새워가며 나에게 줄 가방을 만들었다. 일부러 비싸고 좋은 실을 골라서 세련된 디자인으로 정성 들여 만든 멋스러운 가방을 보내 놓고 친구가 전화를 했다. 전화기 너머로 내가 기뻐하길 바라는 친구의 마음이 느껴지는 데 기쁜 마음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먼저 생겼다. 정성이 감동스럽고 고마운 마음의 크기만큼 그 가방을 쓰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나는 가방이 하나인 지금이 좋았다. 보내준 가방은 멋스러웠지만 매번 들고 다닐 만큼 크고 실용적인 디자인은 아니었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고 싶은 마음과 친구의 정성을 기쁘게 받아 주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올라왔다.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졌다.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말이 이럴 때 실감이 난다. 사랑하는 내 오랜 친구는 내 마음이 좋기를 바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마음만 고맙게 받고 가방을 소중하게 잘 쓸 수 있을 좋은 사람에게 주기로 했다. 친구에게 내가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렸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고 싶은 마음과 가방이 하나여서 느끼는 지금의 행복감을 나누었다.


예상대로 내 오랜 친구는 내 마음을 이해해 주었다. 행여 이해해 주지 못하더라도 미안하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미안하다 한마디면 어지간히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고서야 다 용서해 줄 친구다. 이런 일로 의가 상할 사이가 아니다. 그래서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

  

가방은 얼마 전에 주인을 찾았다. 가방이 예쁘다고 좋아하는 언니를 보니 내 마음이 아주 좋았다. 가방이 진짜 인연을 만나 드디어 이 일이 친구도 좋고 나도 좋은 일이 된 듯했다. 내 사랑하는 언니까지도 좋은 일이 되었다.


어울려 사는 속에서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인연 지은 이들은 받고서도 갚아야 한다 생각하지 사이가 되면 좋겠다. 주고서도 기대하는  없으면 좋겠다. 나의 유난함을 이해해 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해도 의가 상하지는 않을 만한 사이가 되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집과 차를 팔고 건조기를 사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