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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 늘보 Oct 16. 2020

마법 같은 날 개미 한마리가 영혼을 흔들어 놓았다

알고 보니 개미가 나였다 라고 하면 사람들이 날보고 미쳤다고 할까?


자주 가는 제주 동문 시장은 수산 시장이 아주 크다. 잠시 후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커다란 수조 안을 여유롭게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보고 있노라면 모르는 것이 약이고 축복이다 생각된다. 어찌 수조 안의 물고기만 그러랴. 우리 사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법륜 스님께서 시한부 선고를 받고 입원한 친구에게 병문안을 갔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사고를 당해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있었다고도 하지 않으셨던가. 내 인생에 대해서는 한 치 앞도 못 보면서 나 잘났네 하는 마음으로 수조 안의 물고기를 불쌍하게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침에 산책을 하면서 서부두에 한치잡이 배가 들어온 걸 봤으니 아마 저쪽 골목으로 가면 어제 밤사이 잡힌 한치가 들어와 있지 싶다. 한치를 좋아하는 서울 큰언니네 생각이 나는 데 생각과는 다르게 내 발길은 머뭇머뭇거리다 그 골목을 피해서 가고 있다.


세 달 전 이미 큰언니에게 갓 잡은 싱싱한 한치 2kg을 보낸 적이 있었다. 강원도 출신인 형부와 그 형부의 피를 이어받은 조카들은 오징어를 유난히 좋아했다. 오징어보다 부드럽고 맛이 달아 오징어보다 한 수 위라고 쳐주는 한치는 또 얼마나 좋아할까 생각됐다. 그런 생각을 할 때까진 좋았다. 실천에 옮기고 나서야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알게 되었다.


그 골목 한 가운데 위치한 세 달 전 내가 간 수산물 가게에는 커다란 수조가 두 개나 한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수조 속에서 신나게 헤엄치고 있는 활 한치는 맞은편 가게의 가판대에 배를 가르고 누워 있는 죽은 한치보다 크기가 절반 정도로 작아 보였다. 색깔도 훨씬 더 투명하고 반짝거리는 모양이 과연 같은 생물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수조 안을 반짝반짝 신나게 헤엄치고 다니는 한치를 바보같이 싱싱한지 안 한지 확인하느라 자세히 보지 말았어야 했다. 어차피 살아 있는데 싱싱한 게 당연하지 확인할 이유가 없었지 않았는가. 아니면 한치를 준비하는 아주머니의 칼 끝에서라도 눈을 떼었어야 했다.


주문이 끝나자마자 아주머니는 커다란 뜰채를 가지고 오시더니 신나게 헤엄치고 있는 아이들을 연거푸 거두어 내셨다. 커다란 도마 위에서 정신없이 파닥파닥 뛰는 한치를 보니 그제서야 갑자기 마음이 덜컹했다. 한치가 불쌍해졌다. 안타까움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지금이라도 취소할까? 안 되겠지? 아주머니가 화내시지 않을까?


아주머니께서 한 마리 한 마리씩 잡고 커다란 칼로 배를 쓱쓱 가르는 데 내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런 내 표정을 보신 아주머니는 금방 되니까 조금만 기다리라 하셨다. 손으로는 쉴 새 없이 분주하게 배를 가르고 내장을 다듬으시면서 가게 안에 계신 아저씨를 큰 소리로 불러 택배 주문 용지를 건네주셨다.


택배 용지에 주소를 쓰는  마음이 복잡했다. 나의 유난스러움에 화도 났다. 고기도 회도 잘도  먹으면서 이런 일에 마음이 불편한  이중성을 확인하고는 기분이 나빠졌다. 아주머니께 못난 표정을  보이려 고개를 돌렸다.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언니와 형부와 조카들이 맛있게 먹을 모습을 상상하며 애써 마음을 달랬지만 이미 생각이 많아진 후다. 마음이 복잡해졌다.


처음부터 내가 이랬던 건 아니었다. 원래 유난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일에는 조금 무던한 성격이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회 뜨는 모습 정도는 엄마 등의 포대기에 업혀 시장에 다닐 적부터 매일 일상처럼 보아 왔던 흔한 일이다.


사실 이건 모두 개미 때문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갑자기 내 마음속에 들어와 내 영혼까지 헤집어 놓고 간 그놈의 개미 한 마리 때문이다.


그 날은 워싱턴 디씨 근교 메릴랜드 지역에 폭설이 내려 온 가족이 집에 갇혀 있던 어느 해 겨울의 끄트머리였다. 거실에 장식처럼 두기만 하고 잘 사용하지 않던 벽난로를 켜고 아이들이 까불고 노는 옆에서 책을 읽었다. 조용하게 온 세상을 하얗고 깨끗하게 덮은 눈 때문이었을까, 벽난로의 이글이글 거리며 춤추던 불꽃이 사람을 홀린 탓이었을까, 아니면 따듯하게 무릎은 덮은 극세사 이불의 촉감이 유난히 부드러웠던 때문이었을까. 그날 오후의 거실은 지극한 평화와 은은한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읽고 있던 책이 마법을 부린 것도 같다. 문득 책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현재에 그냥 존재한다는 느낌이 무엇인가 참구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마음이 가볍고 지극히 평화로워졌다.


그 날은 정말로 마법 같은 날이었다. 아이들이 까불면서 책 읽는 나에게 와서 부딪히기도 하고 이걸 봐 달라 저걸 갖다 달라하는 데 그 어떤 일도 귀찮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무한한 참을성이 생겼고 평소와는 달리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고 힘들지 않게 자애로운 상태가 계속되었다. 아이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잘 받는 남편도 그날은 편안해 보였다. 우리는 모두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었지만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하는 것이 좋았다. 온 세상의 어지러움이 하얗게 눈으로 덮여 구원받은 그날 우리는 모든 것이 쉽고 자연스러운 가운데 지극한 평화를 나누며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개미를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물을 마시려고 물 잔을 부엌 싱크대 위에 올려놓는 데 그 옆을 기어가고 있는 개미 한 마리를 발견했다. 개미를 가만히 관찰했다. 작은 개미 한 마리가 싱크대 위를 이리저리 더듬더듬 헤매며 가고 있는 모양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갑자기 이 개미가 나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미도 나와 마찬가지로 한 치 앞을 모르고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한 생명이구나. 이 작은 생명이 살려고 이렇게 한발 한발 더듬으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구나. 순간 개미가 내 마음에 들어왔다. 뭔가 표현하기 힘든 깊은 연대감이 느껴졌다. 이 작은 개미에게 거대한 사랑이 느껴졌다. 개미가 나고 내가 개미인 듯 느껴졌다.


사실 부엌에서 개미를 발견하는 것은 큰 일이다. 곧 봄이 시작할 텐데 이렇게 한 마리가 나타나면 순식간에 대규모 개미 군단이 부엌을 점령해 버릴 수 있다. 그러니 여느 때 같았으면 바로 개미 약을 쳤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개미는 휴지로 짓눌러 닦아서 없애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 나는 이제 앞으로 영원히 개미를 죽일 수 없을 것 같았다. 개미가 나이고 내가 개미인데 어떻게 내가 개미를 죽일 수 있겠는가. 이 작지만 고귀한 생명이 더듬더듬 내딛는 위대한 삶의 발걸음을 조금 덩치가 크다는 이유로 어찌 나따위가 휴지로 짓눌러 버릴 수 있겠는가. 나는 그 개미가 더듬더듬 싱크대 상판을 지나 냉장고 옆의 작은 틈으로 들어가는 것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벌레를 함부로 죽일 수 없게 되었다. 길가의 꽃을 꺾지 않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후에 나는 싱크대 상판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개미 군단의 행렬을 발견했다. 평소 같았으면 벌써 인터넷에서 배운 방식대로 개미퇴치약을 조제해서 집안 곳곳에 설치했을 테다. 이 개미퇴치약은 일종의 달콤한 개미 독약 같은 건데 이걸 먹은 개미들이 집에 가서 다른 개미들과 독약을 나눠 먹고 다 같이 죽는다고 했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봄에도 지지난 봄에도 그 퇴치약의 효과를 단단히 보았다. 약을 설치하면 일주일 내에 개미가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약을 조제할 마음이 나지 않았다. 개미가 먹고 죽는다는 데... 한 마리도 못 죽이겠는 데 개미 집단 전체가 죽을 수도 있다는데... 알고서는 도저히 그 약을 쓸 수 없었다. 대신 아이들이 장난감으로 쓰는 작은 빗자루와 쓰레받기가 있기에 그걸 이용해서 부지런히 집안에 나타난 개미들을 쓸어 뒤뜰에 옮겨주었다. 예상대로 개미들은 쓸어내고 돌아서면 나타나고 또 쓸어내면 또 나타났다. 부지런한 개미들과 내가 며칠째 실랑이를 벌인 끝에 개미들보다 조금 더 부지런한 내가 이겼다. 어느 순간 개미 떼가 사라졌다. 대신 뒤뜰의 패티오 벽돌 틈 사이에는 작은 개미집 구멍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그때부터 나는 조금은 유난한 사람이 되었다. 가능하면 벌레를 죽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덕이 아주 높은 스님들처럼 여름철 모기에게 내 온몸을 맡겨 희생한다든지 아니면 비위가 좋아 바퀴벌레와 함께 취침하기를 즐긴다든지 하는 건 아니다. 둘째 아이에게 심한 피부발진을 일으키고 내 여름밤 잠을 설치게 하는 모기는 주저 않고 잡는다. 바퀴벌레도 직접은 못 잡아도 남편을 시켜서는 쉽게 잡는다.


하지만 어떤 벌레든 죽이지 않고 살려서 내 보낼 수 있는 길이 있으면 그렇게 하게 되었다. 집 안에 벌레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게 되었다. 꽃을 좋아해서 이미 꺾여 있는 꽃은 꽃집에서 종종 사지만 길가의 꽃은 꺾지 않게 되었다. 고기도 먹고 식당에서 좋아하는 회도 사 먹지만 기왕이면 이미 죽어서 준비된 것을 먹는 게 마음이 편한 것을 발견했다. 맛있는 동물을 잡아먹고 싫어하는 벌레는 죽이면서도 그렇지 않은 생명에는 연민을 갖는 나의 이중성을 스스로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이중적이든 기만적이든 상관없다. 그저 내 마음 편하자고 그렇게 한다.


부처님께서 왜 살생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지가 조금은 이해가 됐다. 잠시 나눈 개미와의 교감만으로도 이렇게 생명의 소중함이 느껴지는데 만물의 원리와 진리를 깨치신 부처님이나 예수님 같으신 성인들은 아마 당연히 모든 생명이 다 나 자신처럼 느껴지실 테다. 아마 모기마저도 죽이시지 않을 듯하다. 죽이시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기 때문에 안 죽이시는 게 아닐 것 같다. 그 생명이 마치 나같이 느껴져서 죽이시지 못하시는 걸 게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부처님이나 예수님 같은 성인들의 가르침을 잘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들께서 말씀하신 내용들이 잘 모르긴 해도 아마 다 옳지 싶다. 우리가 모르고 지내는 많은 걸 이미 아시고 지혜를 나누어 주시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그날 개미와 교감하길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모기와 눈이 마주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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