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은 눈으로도 느껴지는 은은한 햇살을 맞이하며 조용하게 누워 눈 감은 세상의 평화를 만끽하는 아침이다. 요즘 나는 아침에 일찍 깨어도 눈을 잘 뜨지 않는다. 누가 나를 불러 깨울 때까지는 이렇게 누워 있는 것이 좋다. 알람 없이 감은 눈에 보이는 햇살을 느끼며 천천히 일어나는 이 여유로운 아침의 소중함을 가능한 오래 느낄 테다.
잠은 깊이 자는 잠보다 반쯤 든 선잠이 더 달콤하다. 내가 자는 지도 모르고 자는 깊은 잠은 달콤한지 쓴지 알게 없다. 하지만 잠이 들락말락 할때의 나릇하고 평화로운 기분을 느끼며 자는 선잠이야말로 잠의 달콤함을 즐길 수 있는 기회다. 잠을 깊이 못 자면 피로가 잘 풀리지 않지만 꼭 가야 할 곳도 없고 꼭 해야 하는 것도 없는 나에게는 깊은 잠의 개운함보다 선잠의 달콤함이 더 매력적이다. 직장에 다닐 때는 밤에 자고 싶어도 잠이 안 와 고민이 되던 때가 있었다. 제주 사는 요즘은 잠이 안 오는 밤이면 왠지 신이 난다.
건너편 작은 방에서 부스럭 부스럭 소리가 났다. 이제 잠시 후면 잠에서 깬 작은 아이가 안방으로 올 것이다. 어젯밤 아이가 엄마에게 건넨 인형은 작년 가을 한 테마 파크에 갔을 때 샀던 상어 인형 "샤키주니어"였다. 요 며칠 샤키주니어는 밤에 엄마와 같이 자도록 간택되는 영광을 자주 맞이했다. 아이는 엄마가 제 인형 중에서 샤키주니어를 제일 좋아하는 것을 아는 듯하다. 나는 표시를 안 낸 것 같은데 아이들은 눈치로 알아채는 것이 정말 많다. 그러니 뭔가 표시 안 나게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은데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도 어떻게 조심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는 이 엄마는 아이들만큼의 눈치가 없다.
더듬더듬 이불을 뒤져서 샤키주니어를 찾아 베개 옆에 챙겨 두었다. 잠시 후면 작은 아이가 샤키주니어를 가지러 온다는 핑계로 스르르 이불속으로 들어와 내 얼굴에 뽀뽀 세례를 퍼부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방금 잠에서 깬 척 부스스하게 눈을 뜨고 그 뽀송뽀송 동그랗고 보드라운 볼에 얼굴을 부비고 말랑말랑 젤리 같은 몸을 팔 한가득 끌어안고 폭신폭신한 이불 위를 뒹굴 뒹굴 하며 세상의 모든 행복을 온 몸으로 느낄 테다.
이 순간, 아이들은 선물이다. 향긋하지만 씁쓸한 에스프레소 마키아토 같은 내 인생에 달콤함을 더해 주러 온,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초등학교 3학년, 1학년인 아이들은 이제 조금 컸다고 자기들끼리 노는 때가 많다. 일로 바쁠 땐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놀기 시작하면 옳다구나 하고 일을 했다. 할 일 없는 지금은 나도 아이들 옆에서 혼자 논다. 가끔은 노는 아이들을 가만히 관찰한다.
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배울 게 많다. 아이들이 나에게서 배우는 것보다 내가 아이들에게서 배우는 것이 더 많다. 내가 아이들에게 책상 정리하는 법 같은 사소한 것들을 가르쳐 준다면 아이들은 나에게 인생 사는 이유 같은 굵직한 것들을 가르쳐준다.
아이들은 어쩌면 어른인 우리보다 더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아는 걸지도 모르겠다. 뭐가 자신을 즐겁게 하는지, 슬프게 하는지, 화나게 하는지 분명히 아는 것 같다. 감정에 솔직한 아이들은 울 때 확실하게 운다. 화가 날 때도 확실하게 화내고 즐거울 때도 확실하게 즐겁다. 뭐든 적당히 하는 법이 없는 아이들이 지금 어떤 기분이든 그 기분에서는 큰 소리가 난다. 소리가 나지 않을 때는 생생한 표정이 그 모든 스토리를 다 말해 준다.
본능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는 아이들은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당연한 권리인양 행동한다. 어른인 우리는 왜 사는지 잘 모르겠고 생각할수록 어려운 문제인 듯한 인생의 목적이 아이들에게는 너무나도 간단하고 쉬운 문제인 듯하다. 아이들에게는 사는 것이 당연히 즐거운 일이다. 즐거우려고 산다.
즉흥적인 여행을 종종 떠나는 우리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온종일을 보내고 오게 될 때가 많다. 지나가다 어쩌다 해변 하나만 발견해도 수영복도, 수건도, 비치볼도, 모래놀이 장난감도 없는 아이들이 한나절 내내 바쁘다. 마시던 생수병 하나면 야구도 아니고 피구도 아니고 비치발리볼도 아닌 요상한 게임이 만들어진다. 무성한 나무 사이로 난 구불구불 기다란 산책로나 듬성 듬성 잔디 깔린 널따란 공터라도 하나 만났다 하면 아이들이 용수철처럼 앉은 자리에서 튀어 오른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이상야릇한 모양의 막대기들을 잘도 찾아와 온갖 돌이며 나무와 흙과 요란스럽게도 조우하며 온종일 해가 질 때까지 잘도 뛰어다닌다.
끊임없이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 내고, 또 그 놀이가 주는 즐거움에 완전히 몰입하는 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아... 이게 다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려고 우리가 세상에 나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전에 한 지인이 했던 말대로 삶은 성취하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경험하기 위해 사는 걸지도모르겠다. 우리는 세상을 경험하려고 세상에 나왔나보다. 그러니 매 순간 지금 이 순간만 살면 되는 건가 보다. 이게 다인가 보다.
이 순간, 아이들은 스승이다. 왜 사는지도 모르고 냅다 앞만 쳐다보고 달려가던 내게 잠시 멈추고 물음을 던져 보라 일러 주러 온, 내 인생 최고의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