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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Oct 18. 2020

어머니의 마지막 된장

아이들과 나와 어머니가 사랑 속에서 하나가 되었던 날


제주에선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날 때가 많다. 여름밤엔 모기에 시달리느라 잠을 못 들어서 어머니 생각이 났고 겨울밤엔 강한 바닷바람이 옷깃을 여밀게 해서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제주 여자셨다.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느라 생활력이 강해졌다고들 하는 제주 여자인 어머니는 육지에 나와 결혼을 하시고 가정을 꾸리셔서 생애의 대부분을 부산에서 보내셨지만 평생 제주 여자의 삶을 사셨다. 아들을 간절히 원한 탓에 줄줄이 낳게 된 여섯 딸자식과 사람은 한없이 착하지만 무책임한 남편이 어머니에게 척박한 자연환경이 되어 주었다.


지금 내 나이쯤 때의 어머니의 삶을 생각해보면 이런 저런 사정을 잘 모르는 어린 나의 시선으로 보았던 몇 가지만 기억해도 눈물이 난다. 사는 게 막막해서 죽고 싶으셨던 적도 여러 번이셨을 테다. 자식들 때문에 죽을 수도, 도망갈 수도 없으셔서 그 막막한 심정을 꿀꺽 삼키셨을 테다.


잠 못 드는 여름밤이면 밤늦게까지 내 발을 물수건으로 닦아주시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어릴 적 유난히 병치레가 잦았던 막내딸은 밤이 되면 발바닥이 뜨겁게 느껴진다는 믿기 힘든 병까지 얻었다. 어릴 때부터 허리 디스크에 만성 편도염에 건선 피부염에, 이젠 발까지 뜨겁다고 밤마다 난리 치는 막내딸이 지겨울 법도 하셨을 텐데 어머니는 그런 나를 데리고 양방으로 한방으로 절로, 믿지도 않는 종교 모임에까지 데리고 가셨다. 긴 머리에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높은 단상에 앉아 있던 산신령을 닮은 아저씨와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하던 수많은 아줌마 아저씨들의 치유를 갈구하는 진지한 얼굴을 기억한다. 코를 찌르던 향 냄새를 기억한다.


바람이 찬 겨울밤에도 어머니가 떠올랐다. 한 명이 감기에 걸렸다 하면 사이좋게 나누어 차례차례 같이 앓던 딸 여섯을 키우시는 동안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은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였다. 지금 생각하니 적절한 비유는 아니었던 듯하다. 나무는 가지치기라도 할 수 있지만 자식이라는 짐은 평생 지고 가야 하는 것이지 않은가.


내가 태어나기도 전 어느 해 겨울밤, 어린 큰언니가 포도를 먹다가 포도알 하나가 목에 걸렸었단다. 이것 저것 다 해봐도 포도알은 나오지 않고 언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넘어가자 어머니는 언니를 무작정 들쳐 업고 근처 병원을 향해 냅다 뛰었다고 했다. 어찌나 열심히 뛰었던지 등에 업혀 있던 아이의 목에서 포도알이 튀어나와 살았다고 말하며 어머니는 활짝 웃었다. 업고 뛸 때는 몰랐는데 멈추고 나서 보니 엄동설한에 겉옷 하나 안 걸치고 고무 쓰레빠 한 짝만 달랑 신고 있더라는 말을 참 덤덤하게도 하시던 어머니의 아련했던 표정을 기억한다. 제주의 거센 겨울바람에 옷을 여밀 때면 그때 그 아련한 표정을 짓던 어머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떠올려 보게 된다. 잃어버린 고무 쓰레빠 한 짝이 어딘가에 던져져 있었을 그 모양을 상상해 보게 된다.


어머니에게 어린 자식은 자신의 생명보다 중하셨으리라. 내 발이 시린 지 어떤지 내 몸에 옷이 걸쳐 있는지 어떤지 알지 못하는 때의 어머니에게는 '내'가 없었을 것이다. 오로지 등에 업힌 자식만이 있을 뿐이었으리라. 자식도 마찬가지였을 테다. 어머니의 등에 업혀 들썩이며 정신을 잃어가던 때의 아이에게는 어머니의 등이 세상의 전부였으리라. 업은 어머니의 등과 업힌 아이 사이에는 경계가 없었을 것이다. 마치 눈과 귀와 입이 따로지만 또 동시에 하나의 일부이듯이 어머니와 아이는 그렇게 하나였던 것이리라.


자식들이 다 크고 나서야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바라는 것도 생겼다. 나이 든 어미는 자식이 품을 다 떠나고 나서야 자기 자신이 보였던 것 같다. 품고 있던 것이 떠나고 나서야 품은 자신의 팔이 보였을 것이다. 자식도 어미의 품을 떠난 후 어미를 자기와 따로 보게 되었을 것이다. 정신과에 가서 상담을 하면 200불을 주고 부모님이 잘못했다는 걸 듣고 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자식은 어미의 품을 떠나고 나서야 자신의 등 뒤를 품고 있던 한 인간의 얼굴을 비로소 마주 보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 커서 어미의 품을 떠난 자식에게도 자신의 일부였던 그때 그 어머니의 품이 그립다. 이젠 내 품 안에도 아이들이 안겨있는 데 자꾸 어머니가 품어주던 등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된장을 아끼고 아껴 먹었더랬다. 마지막 남은 숟가락으로 맑은 된장국 한 그릇에 두부 넣은 강된장 한종지를 만들어 고추를 찍어먹는데 왜 그렇게 맛있는지 울면서 먹었더랬다. 아이들에게는 고추가 매워서 운다 했다. 어찌나 매운 고추였던지 끊임없이 눈물이 나왔다.


울음이 멈추었을  문득  어머니도 할머니가 그리우셨으리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셋째 언니를 낳기 전에 돌아가셨다 했다. 어머니는 나보다도  젊은 나이에 엄마를 잃었다. 이번엔 어머니가 불쌍해서 눈물이 났다.


 이상 남은 고추가 없어서  우냐고 다시 묻는 어린 아이들에게 말했다. 엄마도 할머니가 그립다고.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다고. 나도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운다고.


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과 팔로 눈이 부은 엄마를 안아 주었다. 한없이 깊은 위안이 되었다. 이 순간, 내가 자식이 되고 아이들이 나의 어미가 된 듯했다. 아이들의 품에서 어머니의 품에서 느꼈던 하나 되는 사랑이 느껴졌다. 아이들과 나와 어머니가 하나가 되었다.


나도 나의 어머니를 이렇게 따듯하게 안아준 적이 있었던가. 아마 그랬을 테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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