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 삶의 결 1' 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내 어머니의 삶의 주제는 "순응"이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귀한 할머니가 나으신 첫째 딸이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데려온 작은 부인이 자신보다 먼저 큰 딸을 낳고 나서야 나의 어머니를 낳으셨다. 얼마 후 작은 할머니는 아들을 낳으셨지만 나의 할머니는 딸을 하나 더 낳고도 한참을 아들을 못 낳으셨다.
훗날 귀한 막내 삼촌이 태어나자 어머니는 할머니보다 더 기뻤다고 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어머니를 구원해준 막내 삼촌이 아주 좋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삼촌을 제 자식처럼 정성스럽게 돌보았다. 자신은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어도 삼촌이 잘 되는 것이 내가 잘 되는 것처럼 좋았다 하셨다.
그 탓이었을까.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간절함은 남다른 것이었다. 훗날 엄마는 무슨 생각으로 없는 형편에 이렇게 아이를 줄줄이 낳았냐고 책망 반 호기심 반으로 묻는 나에게 어머니가 대답하셨다. 나라고 못하라는 법 있냐고. 남들 다 낳는 거 나도 계속 시도하면 될 줄 알았다고. 니가 아들이었어야 했는데, 너는 꼭 아들일 것 같았는데...라고.
내가 한 여섯 살쯤 되었을 때였다. 어머니가 드디어 어머니를 구원해 줄 아들을 낳으셨다. 어머니 생애 최고의 날이었다고 했다. 온 집안 사람들과 동네 사람들이 축제 분위기로 들떴다. 어머니는 처음으로 미역국을 당당한 마음으로 드셨으리라. 온 세상을 다 가진 듯하셨으리라. 다음날 아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실 때까지는 말이다. 나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언니는 그때의 침울했던 집안 분위기와 어두운 방안에 힘없이 누워있던 어머니의 뒷모습이 분명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다들 병원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멀쩡하게 건강했던 아이가 어찌 밤사이 죽어버릴 수 있나 했다. 공휴일이었던 그날 밤 사이 아마 경험 없는 간호사가 아이를 씻기거나 옮기다가 실수를 했을 거라고 했다. 학식이 높고 세상살이에 밝은 이웃에 살던 이모부가 병원을 고소해야 한다고, 아이의 시체를 부검하자 하셨을 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아이를 되살려 놓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해라.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하지 마라.
훗날 내게 어머니는 그날 비로소 아들에 대한 간절함을 내려놓으실 수 있었다고 하셨다. 내 팔자에는 아들이 없음이 마침내 담담하게 받아들여졌다고 하셨다. 그제서야 아이 낳기를 그만둘 수 있었다고 하셨다. 할머니와 달리 어머니는 끝내 아들을 통해서는 구원받지 못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순응을 통해 구원을 받으셨다. 아들이 없는 본인의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셨을 때 비로소 그 끝없는 갈증이 멈추었고 평안을 얻으셨던 것이다.
어머니는 순응을 통해 평안을 얻으셨다.
어머니의 첫 해외여행은 나와 함께 간 일본 여행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부모님이 계신 고향 부산으로 돌아와서 갓 임용된 영어 교사였다. 월급을 모아 겨울 방학 동안 어머니와 일본으로 2주간 여행을 갔다. 도쿄에서 시작하여 신칸센을 타고 오사카와 교토 및 나라를 여행하고 오는 간단한 일정이었지만 길치 어머니와 외국에서 영어만 알면 다 통할 줄 알았던 나의 첫 일본 여행은 잊지 못할 모험과 추억으로 가득했다.
출발 전에 내가 읽은 책 중에 '가능하면 많은 곳에서 똥을 싸라'는 메세지를 전한 여행 관련 책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그 말을 참 마음에 들어하셨다. 도쿄 공항부터 시작해서 신주쿠 공원, 도쿄 타워, 우에노 시장, 디즈니월드 등 어딜 가든 어머니는 매번 내게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나 방금 여기서 똥 쌌다."
어머니와 나는 가능한 많은 곳에서 똥을 싸기 위해 부지런히 온 도시를 돌아다녔다. 해외여행 경험이 거의 없던 나는 여행 책자에 나온 곳은 모두 다 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64세 노모를 쉴 새 없이 온갖 군데로 끌고 다녔다. 돈을 벌어 본 지 1년이 채 안 되는 나는 일본 엔화가 너무 비싸게 느껴졌다. 그래서 노모와 식당에서 제일 싼 음식만 골라서 먹었다. 쇼핑은 무조건 눈으로만 했고 전철 한 두 정거장 정도는 걷기 일쑤였다.
어리석은 나는 그렇게 여행경비에서 아낀 돈으로 전자상가에서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샀다. 정작 어머니에게 사 드린 선물은 도교 디즈니랜드에서 한참을 고르고 골라서 산, 앞부분에 미키 윤곽이 살짝 수놓아져 있는 등산 모자 하나가 다였다. 그 모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가 가장 자주, 그리고 아껴 쓰는 모자가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둘째 언니와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언니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져가라 했을 때 나는 그 머리에 닿는 부분이 완전히 다 헤진 낡은 모자를 챙겼다.
그 여행에는 어머니에게도 나에게도 뭔가 아주 특별한 것이 있었다. 나의 어리석음과 철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와 나는 둘 다 아주 많이 행복했었다. 그 후로도 그 여행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우린 그때의 그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그 여행이 특별했던 이유를 한참의 세월이 지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도 6개월이 지나서야 알았다. 어머니의 삶의 결이 문득 보였던 그날, 일본 여행 동안 어머니가 내게 보여 주셨던 행동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연달아, 그리고 동시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제야 왜 그 여행이 그토록 특별한 느낌으로 남아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여행 동안 어머니는 그야말로 YES맨이셨다. 어머니는 내가 하자고 하는 일에 무조건 "응, 그래. 그러자."라고 하셨다. 철없이 이기적인 딸이 노모를 하루 종일 끌고 다닌 것도 모자라 밤늦게 도쿄타워를 가서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근처에 있던 숙소에 들어가는 대신 지하철을 타러 가자고 했을 때도 어머니는 "응, 그래. 가자." 하셨다. 여러 군데를 다니려면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다녀야 한다고 새벽부터 깨우며 재촉할 때도 어머니는 "응, 그래. 빨리 나가자." 하셨다. 도쿄 디즈니랜드에서 무서운 놀이기구를 꼭 타야겠으니 혼자 앉아 기다리시라고 했을 때도 "응, 그래. 그럴께", 심지어 그것마저도 혼자 타니 재미가 없다고 엄마가 좀 무서워도 같이 타자고 했을 때도 어머니는 무조건 "응, 그래. 그러자" 하셨다. 노모는 난생 처음 타보는 후룸라이드의 곤돌라가 바닥으로 곤두칠 때 오줌을 찔끔했다고 하시면서도 활짝 웃으셨다. 어머니는 딸이 하자는 것은 무조건 다 좋다 하셨다.
어머니는 무조건 순응하셨다. 어머니는 철없는 딸이 무엇을 하자고 하든 무조건 받아들이셨다. 성경에서 말하는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는 마음으로, 그렇게 기쁘게 받아들이셨다. 어머니는 자발적으로 순응하셨다. 그리고 기꺼이 순응하심으로써 즐거우셨다. 딸은 그런 어머니와 함께 해서 즐거웠다. 아마 딸의 즐거움이 어머니에게는 또 더한 즐거움을 주는 것 같았다. 딸은 그래서 어머니가 더 좋았다. 어머니는 그래서 또 더 기뻤을 것이다.
어머니는 순응을 통해 기쁨을 얻으셨다.
잊고 있던 단편적인 기억들이 일순간에 머릿속에 떠오르며 마치 실로 꿰이는 것처럼 연결되었다. 문득 어머니 삶의 결이 보였다. 나는 어머니가 나에게 남기신 메세지를 이해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순응하라 가르치셨다. 삶이 그 어떤 것을 네게 주더라도 순응하라. 삶이 네게 오리를 가 달라고 하면 기꺼이 십리를 가 주어라. 그리하여 기꺼이 사는 삶의 기쁨을 누려라.
어머니가 그렇게 돌아가신 것이 더 이상 우연이 아니었다. 나쁜 날씨 때문에, 그리고 남편 때문이라 생각했던 이유들이 어쩌면 삶이 나를 이 길로 이끈 필연이 아닐까. 어머니가 임종을 통해 나에게 순응하라는 마지막 가르침을 주시고 떠나신 것이 아닐까. 행여 아니더라도 나는 순응해야 할 일이었다. 삶이 어떤 것을 주든, 내 뜻대로 안되는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순응할 일이었다.
순간 어머니가 살아서 말씀하시는 듯했다. 순응하라. 그리하여 평온하라. 그리고 기뻐하라.
남편에 대한 원망이 눈 녹듯 사라졌다. 아니, 처음부터 원망할 것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남편은 그저 떠오른 생각을 말하고 행동했을 뿐이었다. 남편은 단지 남편의 삶을 산 것이었다. 어머니의 임종을 못 보고 보내드린 것은 그저 이 삶의 한 사건이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저 내가 살아야 할 이 삶의 한 사건인 것이다. 그저 순응해야할 일이었던 것이다.
당시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남편을 탓하던 마음도 눈이 녹듯 사라졌다. 그 또한 그 또한 남편이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 모습인 것임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었다. 남을 원망하고 때론 상황을 원망하고 했던 그 모든 것들이 처음부터 원망할 것이 없었다. 한없이 부족한 엄마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마저도 용서가 되었다.
우리 모두는 그저 각자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이 그 어떤 것을 주던지 순응할 일이다. 주어진 것에 온전히 순응하며,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최선을 다해 살아갈 일이다.
순간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른 삶을 살고 있지만 또 동시에 같은 하나의 거대한 삶을 함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자 남편과 아이들과 어머니와...이 모든 인연 지은 이들과 생명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 샘솟았다. 세상 모두가 하나가 된 그 자리에 가슴 벅찬 감사함이 넘쳤다. 원망과 자책이 사라진 자리에 한없는 사랑과 감사함만이 남았다.
훗날 생각했을 때 나는 어머니와 내가 서로에게 삶에 순응하라는 메시지를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했다. 마치 막내딸인 내가 반드시 아들이었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게 태어남으로써 탄생과 동시에 어머니에게 순응하라는 메세지를 전달한 것처럼 어머니도 내게 임종을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음으로써 돌아가심과 동시에 나에게 순응하라는 메세지를 주신 게 아닐까.
어머니의 임종을 함께 한 넷째 언니가 돌아가시기 전 어머니께 물었다고 했다. "엄마, 딸들한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은 없어?"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
삶의 마지막 순간에 딸들이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고 살며 행복하기를 바랬던 어머니의 사랑을 떠올리며 나는 그 말씀의 깊이를 마음 속으로 가만히 느껴 보았다. 그러자 나에게는 어머니의 그 마지막 말씀이 역설적이게도 "순응하고 살아."로 들리는 것이었다. 나에게는 어머니의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라는 그 말씀이 기꺼이 사는 삶의 기쁨을 누리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삶이 무엇을 주든지 순응하여 삶이 주는 기쁨과 평온을 마음껏 누리라는 말씀으로 들린다.
그리하여 나는 삶이 나에게 오리를 가 달라고 하면 십리를 가 주겠다 생각했다. 삶이 무엇을 주든지 기꺼이 순응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하고 또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어머니께서 가르치신 대로, 기꺼이 사는 삶의 기쁨과 평온을 누리리라 그렇게 기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