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보선생 Mar 02. 2021

글을 왜 쓰는가

읽어 주지 않는 글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마도 글을 왜 쓰는가에 대한 고민은 글이 잘 안 써질 때 하는 걸 것이다. 나 역시 한동안 글이 잘 안 써졌다. 어느 순간 글의 샘물이 바닥이 났는지 그동안 흘러나오던 글들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즐겨보던 일상 웹툰에서 소재가 고갈될까 고민하던 작가가 떠올랐다. 어쩌면 일상에서 소재를 얻는 사람들은 누구나 비슷한 일을 한번쯤은 겪는지도 모를 일이다.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이 어려운 이유는 처음에 글쓰기를 우연히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어떤 온라인 카페의 소모임에 가입하면서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다. 블로그에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을 쓴 것을 시작으로 그 글을 본 언니가 브런치를 소개해주어 브런치도 시작했다. 브런치를 통해 많은 훌륭한 작가님들을 만났다. 주변에 이렇게 많은 분들이 글을 쓰고 계신 줄 몰랐다. 글을 통해 멀리 있는 지인들에게 자연스레 소식이 전해졌다. 글쓰기를 통한 소통의 즐거움을 발견했다.


흘러나오는 글을 쓰는 일은 아주 쉬웠다. 편안한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글은 쓸 때도 편안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누워있기를 정말 좋아하는 내가 누워 있다가도 생각이 흘러나와서 벌떡 일어나 앉아 글을 쓸 때가 많았다. 길을 걷다가도 글이 흘러 나와 가던 길을 멈추고 끄적였다. 커피를 마시다가도 글이 쓰고 싶어져서 채 다 마시지 못한 커피가 식은 적도 있었다. 제주의 자연은 신기한 글감 창고다. 자연을 산책하러 나갈 때면 핸드폰을 가지고 나갔다. 떠오르는 생각을 받아 적기 위해서다. 하루에 하나씩 글감이 흘러나온 날이 많았다.


한창 흘러나오는 글들을 쓰던 그때 누군가 나를 작가라고 부르기에 나는 작가가 아니라고 한 적이 있다. 흘러나오는 내용을 그저 받아쓰기하는데 작가라 불리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제를 잡고 글을 쓰는 글쓰기 모임에 초대를 받았을 때도 손사래를 쳤다. 블로그에 올리는 영어 공부에 대한 글은 언제든 쓰겠다 마음을 잡고 앉으면 쓸 수 있다. 하지만 브런치에 올리는 삶에 대한 에세이는 그렇게 쓸 수 없었다. 그저 내용이 내 마음에서 흘러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는 없었다. 그렇게 쓰는 법 외에 다른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런 나의 글쓰기가 고비를 맞이한 것은 아마 출판사에서 연락이 온 다음부터였던 것 같다. 한 작은 출판사의 대표님께서 브런치 글을 보고 출판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연락을 주셨다. 코로나로 인해 힘든 사람들이 많은 이 시점에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글을 출판하고 싶다고 하셨다. 뜻깊은 취지가 마음을 울렸다. 심지어 그분께선 내가 보낸 에세이를 꼼꼼히 다 읽어보시고 세심한 피드백도 주셨다. 출판하기에는 에세이의 양이 부족하니 조금 더 써 보라고 하셨고 남편과 암을 치유하며 겪은 경험에 대해서도 조금 써 보라고 하셨다. 좋은 인연을 만났구나 생각했다. 진심으로 감사했다. 출판을 하게 된다면 꼭 이 분과 출판하고 싶었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그때부터였다. 글이 잘 안 써진 것은. 그동안 저절로 흘러나오던 글감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토록 쉽게 느껴졌던 글쓰기가 갑자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한참을 씨름하고 쓴 글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경험을 처음 한 날,  글이 잘 나오든 잘 나오지 않든 꾸준히 글을 쓰는 작가님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올라왔다. 마음이 한없이 겸손해졌다.


나는 왜 갑자기 글 쓰는 것이 어려워진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는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찾았다. 소설의 주인공 조르바는 까마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까마귀는 처음에는 까마귀답게 당당하게 걸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까마귀는 문득 비둘기처럼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비둘기의 걸음걸이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날부터 이 불쌍한 이 까마귀는 자기 본래의 걸음걸이를 잊어버렸다고 했다. 결국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까마귀는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어기적 어기적 걷게 되었다고 했다.


어쩌면 나는 어기적 어기적 걷는 까마귀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답게 글을 쓰는 법을 잃어버렸던 것 같다. 출판을 생각하고 독자를 생각하고 출판사 대표님을 생각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나만의 글을 쓰는 법을 잊기 시작한 게 아닐까. 다른 사람이 내 글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생각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글쓰기가 쉽지 않았다. 책의 목차를 짜고 어떤 주제로 어떤 내용의 에세이를 더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그 순간부터 더 이상 글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글 쓰는 법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내가 왜 글을 쓰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 나는 왜 글을 쓰는 걸까?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행복해서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동안 제주에서 살면서 감사한 마음과 감동적인 느낌이 너무나 충만하고 넘쳐서 그것을 글로 옮겼다. 행복한 마음에서 나오는 소재들을 글로 쓰는 것은 아주 즐거운 일이었다. 행복한 마음을 글로 쓰다보면 그 행복이 더 커지곤 했다. 그러니 결국 나의 기쁨을 위해 글쓰기를 시작한 셈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이유가 있었다면 아마도 글을 읽는 분들도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꼭 출판을 하기 위해서 글을 쓴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출판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때부터 비둘기 흉내를 내기 시작한 걸지도 모르겠다. 순수했던 글쓰기의 목적이 시나브로 변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글쓰기를 통해 행복을 나누고 함께 행복해 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출판이 목적이 되고 나를 증명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렸던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삶은 내가 왜 글을 쓰는가 하는 바로 이 질문을 하게 하기 위해 내게 글쓰기를 시작하게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고민에 이르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한 게 아닐까.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있던 은근한 집착과 끈질긴 욕심을 비춰 보기 위해 내가 글쓰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동안 화면 속에 글자들로 나를 펼쳐 놓아 보았을 때 나 자신에게 조금 더 솔직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어쩌면 삶은 나에게 글쓰기를 통해 나를 더 솔직하고 자세하게 돌아보라 말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만약 글을 꼭 써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글감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출판을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글이 어떤 내용이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글쓰기 자체가 즐거워서 쓰는 것이라면 누가 읽어주든 읽어주지 않든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나는 잠시 독자들이 읽어 주지 않는 글은 소중한 글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고 독자들이 읽고 싶어 할 만한 글을 쓰라는 조언을 내가 잠시 잘못 이해했던 거다. 사람들이 읽고 싶어 하고 도움되는 글을 쓰는 것은 분명 소중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읽어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 글이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둘은 같은 말이 아니었던 게다. 마치 비둘기와 까마귀가 같은 새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출판되지 않은 글도 귀한 글이다. 반쯤 쓰다만 글도 완벽한 과정의 글일 것이다. 누가 읽어주지 않는 글도 의미 있는 글이다. 결국엔 쓰지 않은 글마저도 소중한 글일지도 모르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즐겁고 의미 있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