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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Mar 04. 2021

겨울이 있어서 더 찬란한 제주의 봄

한 겨울 속에서도 봄을 알아본 친구를 생각하며 쓴 글

겨울이 있어서 봄이 더 찬란하다는 말이 실감 나는 제주의 아침이다. 아직은 쌀쌀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피부에 닿는 차가운 느낌이 생생하다. 바닷가 갯바위도 이런 느낌일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철썩 치는 파도를 온몸으로 맞이하는 갯바위도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갯바위는 쉴 새 없이 내리치는 파도 덕분에 자신의 존재를 더 생생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차가운 바람이 있어 내 뺨의 느낌이 생생한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갯바위도 파도 덕분에 사는 맛이 나는 게 아닐까. 제주 바람을 맞을 때 사는 맛이 생생한 나처럼 말이다.


바닷바람을 맞아 차가워진 두 뺨 위로 따듯한 햇살이 내리쬐었다. 시원 따듯한 감각이 자아내는 이 오묘한 느낌은 아마 햇살 가득한 이른 봄날 바람 세찬 해안가에서나 느낄 수 있는 것일 게다. 요즘 제주의 바닷가에선 차가운 공기와 따듯한 햇살이 어우러져 사는 맛이 아주 생생하다. 추위를 잘 타는 나이지만 이런 때는 겨울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겨울이 있어서 봄이 더 찬란한 것이 분명하다.


봄 햇살이 한창인 제주의 길가 나무에는 작은 꽃봉오리들이 싹을 틔우고 있었다. 솟아나는 싹을 보고 있자 하니 내 몸이 함께 근질거렸다. 가슴에서부터 시작한 간질간질 한 설렘이 피부를 뚫고 나오는 느낌에 잠시 나무가 되는 상상을 했다. 따듯한 날씨에 싹을 틔우는 나무들도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봄날에 대한 설렘이 나무의 몸과 마음에 넘치도록 차올라 더 이상 속에 담아 둘 수만은 없는 게 아닐까. 그 차고 넘치는 설렘이 껍질을 뚫고 싹으로 틔여 나오는 게 아닐까.


멀리 사는 한 친구에게 요즘 제주에는 봄이 오고 있다고 말하자 친구가 자기는 지난 겨울이 한창일 때 이미 봄이 오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 친구는 하얀 눈에 파묻힌 앙상하고 딱딱한 나뭇가지 안에서도 이미 싹이 자라고 있는 것이 보였다고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봄이 싹트고 있었다고 했다. 한 겨울 눈 속에서도 봄을 볼 수 있는 그 친구의 눈이 부러웠다. 그런 귀한 눈을 가진 친구가 좋았다. 그런 친구를 둔 내가 자랑스러웠다. 그 친구가 자랑스러운 내가 좋았고 봄을 조용히 품고 있는 겨울도 자랑스러웠다.


겨울은 봄을 품고 있다. 봄도 겨울을 품고 있다. 계절뿐이 아니다. 모든 것이 서로서로를 품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돌고 도는 탓이다. 살아가면서 고난과 행복을 양쪽에 두고 시소를 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삶은 괴로움과 즐거움 사이의 끊임없는 반복의 연속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고난이 없으면 즐거울 일도 없고 즐거운 일이 없으면 고난이 있을 일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고난도 즐거움의 일부이고 즐거움도 고난의 일부일 것이다. 그러니 고난이 왔을 때 그 속에 품어진 즐거움을 볼 수 있다면 정말로 멋진 일일 것이다. 마치 한 겨울 속에서 나의 친구가 봄을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언젠가 한창 힘들 때 법륜스님의 가르침 중에 일이 어려움 없이 쉽게 성취되길 바라지 말라는 말씀이 깊이 와 닿았던 적이 있다. 어떤 일로 힘들었는지는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니 아마도 그때는 심각했지만 지금은 더 이상 중하지 않은 일이었지 싶다. 지나고 나면 생각도 안 날 일에 뭘 그리 죽을 것처럼 괴로워했나 생각하니 헛웃음도 나온다. 물론 그때의 나에 대고 헛웃음을 지었다면 뺨을 맞을 일이다. 제주의 바람과 햇살로 시원 따듯해진 이 두 뺨이 한순간에 얼얼 화끈해질 일이다. 어쩌면 사는 맛이 더 생생해질지도 모를 테다.


세월에 파묻혀 지금은 흐릿해져 버린 그때이지만 한 가지 분명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어느 밤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질문했던 기억이다. 괴로움의 바닥을 쳤던 그 순간 나는 문득 내가 인생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생각했었다. 나는 내 인생의 목표를 원하는 성과를 빠르게 얻는 데에 두고 있는가 아니면 마음과 정신이 더 성숙해지는 데에 두고 있는가. 후자에 초점을 맞춘다면 정말로 법륜스님 말씀대로 빠르고 고난 없이 성취하는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그 과정에서 나의 마음이 더 성숙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나 자신과 남을 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힘든 중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된다면 그 어려움을 겪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나는 어려움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을 갖기를 기도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나를 찾아온 어려움을 두 팔 벌려 환영하며 맞이해야 할 일일 런지도 모르겠다.


어려움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은 학습심리학에서도 이미 연구된 주제다. 학자들이 바람직한 어려움 (desirable difficulty)이라 부르는 개념이 있다. 공부하는 내용이 조금 어려울 때 학습이 가장 잘 일어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공부를 하다 내용이 쉽게 이해되고 기억이 잘 나면 공부를 많이 했다고 뿌듯하게 느낀다고 한다. 반면 공부의 내용이 어려우면 의기소침하거나 공부가 잘 안된다고 답답해한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답답해도 애를 써서 기억을 떠 올릴 때 가장 많은 학습이 일어난다. 극복할 어려움이 있고 그 어려움을 극복할 때 성장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전에 잠시 다니다 말았던 헬스장의 트레이너는 근육을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했었다. 근육을 키우려면 이미 들 수 있는 무게보다 조금 더 무거운 중량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근육이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들어야 근육이 새로운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더 강하게 자란다는 것이다. 어쩌면 몸의 근육이나 두뇌의 근육이나 마음의 근육이나 성장을 위해 어려움이 필요한 것은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어쩌면 성장하기 위해서 인생에서 어려움을 꼭 겪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런 과학적인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해서 어려움 겪는 것을 좋아하는  아니다. 나는 젊었을 때도 지금도 고생을 사서 하는 것을 좋아라 하지 않는다. 어차피 나는 헬스장을 호기심에 잠시 다니다  사람이지 않은가. 성장하기 위해 애써 노력하는 것을 즐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에 가까울 것이다. 오죽하면 별명이 나무늘보다. 나는 그저 혹시라도 앞으로 고난이 찾아온다면, 살아가다 어쩔  없이 고난을 맞이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고난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잠시나마 알아볼  있다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로 멋진 일일 것이다. 나는 아마 아주 자랑스러운 마음일 것이다. 마치  겨울 속에서 봄을 알아보았던 나의 친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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