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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Oct 03. 2020

선택의 폭은 좁은 게 좋을 수도

선택의 패러독스

17년 전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슈퍼마켓이었다. 요즘에야 한국에서도 대형마트에 가서 쇼핑을 하는 것이 흔한 광경이 되었지만 2000년경에만 해도 고향 부산에 까르푸라는 대형마트가 최초로 들어와서 친구들과 함께 우르르 구경을 갔던 기억이 있을 정도다. 그러니 주로 시장이나 동네 슈퍼마켓에서 식료품이나 필수품을 사던 나는 미국 슈퍼마켓의 그 어마어마한 크기에 완전히 압도당했었다.


미국의 슈퍼마켓은 크기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하다 못해 케첩 하나를  사려고 해도 어찌나 종류가 많은지... 여러 가지 다른 브랜드에 다양한 사이즈의 포장 용기 재질이나 디자인에 따라서도 제품이 다 다르고, 각 브랜드 별로 그 안에서도 설탕이 덜 들어간 것, 매운맛이 첨가된 것, 홀스레디쉬라고 불리는 우리나라의 생강 비슷한 뿌리채소의 맛이 첨가된 것 등등 온갖 종류의 케첩이 판을 친다. 케첩 하나 사러 왔다가 2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온통 케첩으로 뒤덮인 가판대 앞을 떠나질 못하고 있다. 케첩이 이럴진대 온갖 모양과 색깔과 원재료와 브랜드의 다양성이 넘쳐나는 파스타 면하나라도 고를라 치면 하루 종일이 걸려도 모자랄 판이다. 그뿐인가? 시리얼 판매대는 그야말로 형형 색색의 장관이 끝없이 펼쳐진다. 


그 후 십수 년을 미국에서 살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게 된 슈퍼마켓이 있다. Trader Joe's (트레이더 조스)라고 불리는 이 슈퍼마켓은 독일에 본사를 둔 식료품점이다. 사실 미국 내에서는 식료품계의 후발 주자이지만 최근 지난 2년간 미국 소비자들이 가장 사랑한 식료품 체인으로 선정될 정도로 지금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트레이더 조스는 독특한 상품과 파격적인 가격의 유기농 제품 등으로 유명하지만 내가 특별히 이 슈퍼마켓을 사랑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상품 선택의 폭이 아주 좁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애용하던 워싱턴 디씨의 14번가에 위치한 트레이더 조스에는 딱 한 가지 종류의 케첩이 있었다. 트레이더 조스 유기농 케첩. 그 외의 케첩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사실 미국의 다른 대형 슈퍼마켓의 1/3 정도밖에 안 되는 크기의 이 식료품점의 매장은 거의 대부분 트레이더 조스 브랜드를 달고 있는 제품들로 채워져 있다. 생산자와의 직거래와 스토어 브랜딩을 통해 양질의 제품을 저렴한 가격에 제공하는 것이 회사의 방침인 탓이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이런 방침이 의외의 부수적인 효과가 있다. 식료품에 다양한 브랜드가 없기 때문에 제품을 선택을 할 때 고민할 필요가 별로 없는 것이다.


트레이더 조스에 들어와 있는 제품들은 이미 그들이 "Product Selector"라고 부르는 제품 선정 전문가들의 수많은 발품 팔이와 맛보기를 통해 선정이 된 것들만이 브랜드를 달고 들어온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무수한 케첩 중에서 나는 단연 트레이더 조스의 케첩을 최고로 꼽는다. 맛도 있고 유기농이기까지 하니 이런 훌륭한 선택을 해준 Product Selector들에게 감사한 마음까지 들 정도다. 그뿐인가? 그들은 선택에 들어가는 나의 소중한 시간과 고민에 쏟아부어야 하는 에너지까지 줄여 주었다. 물론 소비자의 선택권을 제한한다는 불만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들은 감사할 뿐이다. 바쁜 내 삶의 질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나만 이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심리학자들은 이미 사람들이 너무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면 결정 장애를 일으켜서 오히려 불행하게 느낀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Paradox of Choice (선택의 패러독스)라고 불리는 이 현상에 따르면 사람들은 선택의 여지가 많을 때 자유롭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 마비의 증상을 겪는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선택의 자유가 많을수록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미 지나치게 많은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는 선택지가 많이 주어질수록 오히려 불행하게 느낀단다. 선택의 여지가 무조건 많은 것만이 좋은 게 아니라는 것이 이미 과학적으로도 밝혀진 사실이었던 것이다. 


일상을 살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혹시 내가 사소한 것에 너무 많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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