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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주 늘보 Nov 15. 2023

행복의 추구

The Pursuit of Happiness

지난 글 우연히 행복을 발견한 날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2006년에 개봉했던 The Pursuit of Happyness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를 그 영화의 배경인 샌프란시스코의 근교에 살 때 관람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윌 스미스가 아들과 함께 출연했던 그 영화의 주인공 가난한 세일즈맨이 주식 중개인으로 성공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입니다. 영화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리며 성공했던 것은 반복되는 어려움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꿈을 추구하는 그의 용기가 닮고 싶은 우리의 마음에 닿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평소 무심코 지나쳤던 차이나타운의 허름한 어린이집 간판들이 자꾸 눈에 밟혔던 기억이 납니다. 영화 속에서 어려운 시절로 묘사되었던 그 장소가 유독 친숙하고 다정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생각했던 기억도 납니다. 어쩌면 저는 결국 성공을 이룬 상태의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성공을 추구하고 있던 그 시절의 주인공에게 더 마음이 갔던 건 지도 모르겠습니다.




헌법에 행복추구권이라는 것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모두 행복을 원하고 바라고 있다는 증거겠지요. 만약 누군가 무엇을 원한다면 그건 아마 결국 행복을 위한 것일 겁니다. 단란한 가족을 원하는 사람에게 왜 가족을 원하느냐 되물으면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답할 테지요. 건물주가 되길 원하는 사람에게 왜 그것을 원하느냐 물으면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 답했다가도 왜 돈이 많았으면 좋겠냐고 하면 결국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답이 나올 테지요. 그러면 행복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행복해지는 걸까요? 아니, 애초부터 행복이 뭘까요?


마흔이 될 때까지 저는 성취지향적인 삶을 살았었습니다. 특히 공부, 학업적인 성취를 추구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겠지만 어렸을 때 공부를 잘하면 부모님이 참 좋아하셨습니다. 그 세대 부모님들께서 생각하시는 성공의 기준이라는 것이 좋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안정적인 직장을 갖는 것이었잖습니까. 어려서 전쟁을 겪으시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셨던 부모님께서는 자식들이 공부를 잘해서 인정받는 것이 최고라 여겨지셨던 것 같습니다. 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은 굶을 걱정 안 해도 되던 시대에 가난한 살림의 목표이자 희망은 자식들이 좋은 교육을 받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학교에서 성적표나 상장을 받고 돌아오는 날은 어머니가 카레를 만들어 주셨었습니다. 상장을 받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가슴 벅찬 발걸음이 채 몇 걸음도 가지 않아 달음박질로 변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리막길에서 달음박질하면 넘어진단 잔소리도 이런 날은 귓등으로도 안 들립니다. 그런 날엔 아무리 힘껏 달려도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걸 보면 제 무의식마저도 넘어지고 일어나는 시간을 아까워했던 것 같습니다. 어지간히도 집에 빨리 도착하고 싶었나 봅니다.




하필 잘 하는 것이 공부여서 다행이었던 걸까요? 아들을 원해서 딸만 줄줄이 여섯이었던 집의 막내딸은 어머니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일찌감치부터 학문적 성취를 통해서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제 무의식에 자리 잡았습니다.  


사랑이 아주 많이 고팠나 봅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임용고시를 패스해서 선생님이 되고 난 후에도 저는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미국 유학을 떠났고 석사를 하고 한국의 교직을 그만두면서까지 박사를 하고, 끊임없이 학업을 통해서 성취하려고 했습니다. 취직한 후에는 더 이상 학문으로 이룰 수는 없으니 직장에서 승진을 위해서 계속 다음 목표를 찾아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원하는 것을 많이 달성했지만, 그 어떤 것도 충분하지 않은 것 같았어요. 그 어떤 성취도 지속적인 행복을 주지는 못하는 겁니다. 항상 뭔가가 끝나면 또 다른 무언가를 찾아다녔습니다. 이게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가끔 생각은 했어요. 하지만 인생이 원래 그런 거 아닐까도 생각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시지프스가 있지요. 신의 왕 제우스에게 형벌을 받아서 가파른 언덕 위로 큰 돌을 밀어 올려야 했던 인물입니다. 언덕의 정상으로 돌을 올려놓으면 굴러떨어지고 다시 올려놓으면 굴러떨어지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형벌에 처했던 인물입니다. 어렴풋이 제 삶이 그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방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계속 추구하고 성취하고 성취 후에는 다른 목표를 세우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날이 당시의 제게 특별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 전반전에서 워낙 성취지향적이었기 때문에 이유 없이 행복하고 평화롭고 가슴 속에서 조건 없는 사랑이 느껴졌던 그날이 제게 그토록 특별했는 지도 모릅니다. 사실 그날의 경험을 꽤 오랫동안 남편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었습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을 것 같았어요. 나를 미친 사람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볼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직장에서 친하게 지내는 동료에게 그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동료가 이러는 거예요.



I remember tasting that sort of absolute happiness myself.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런 절대적인 행복을 맛본 적이 있어


동료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회사 입사 후 오랫동안 그리스어 교사 계약직으로 일을 했었답니다. 입사 후 어린아이 둘을 출산하고 키우면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석사 과정에 입학해서 학위도 따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지금 그녀의 자리, 교육 상담가 자리에 이르렀답니다. 부단한 노력과 몇 번의 시도와 실패와 재시도 끝에 결국 최종 인터뷰를 마치고 고향인 그리스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햇살 좋은 날 수영장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합격 전화를 받았답니다. 전화를 끊고 수영장에 들어가 누워서 둥둥 떠 있었을 때, 바로 그때 설명할 수 없는 지극한 행복을 맛봤다는 겁니다.  


동료는 그날 수영장에서의 느낌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구름한점 없이 맑고 파란 하늘과 바다, 온통 반짝 거리던 햇살, 코를 스치던 바람의 느낌, 누워있는 물의 출렁거리던 움직임, 귀가 물속에 잠겨있던 때의 고요한 느낌, 온 몸으로 퍼지던 완벽한 해방감. 자신의 그날을 자세히 묘사하며 동료가 말했습니다.  


At that time, I didn’t need anything else in the world.
I was absolutely content.
그때는 말이야, 세상 다른 어떤 것도 필요치 않았어.
난 완전히 만족해 있었거든.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닙니다. 잠시 후 그녀가 말 끝을 흐렸습니다.  


Well, this was all I wanted back then. But now, hahaha.
그래, 그땐 이게 내가 원한 전부였지. 그런데 지금은 뭐… 하하하.




행복은 그렇게 정의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원하는 것이 없는 상태. 지금 이 상태로 모든 것이 갖추어져 만족스러운 상태. 그리고 우리는 모두 이 상태를 추구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보통은 원하는 것을 이루는 순간 잠시나마 더 이상 다른 것을 원하지 않는 상태를 경험합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을 때 지극한 행복감을 느끼고 만족감을 느끼는 것도 그 순간만큼은 다른 원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물건을 사서 행복하다면 그것 역시 그 물건의 존재 때문에 행복한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가졌을 때 잠시나마 원하는 것이 내려 놓아진 내 마음의 상태 때문일 겁니다. 그렇지 않고 그 물건 자체에 행복이 있는 거라면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그 물건이 주는 행복의 크기가 줄어들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우린 이미 경험으로 압니다. 그토록 기뻤던 첫 직장도, 첫 차도, 새 아파트도, 꿈꿔왔던 결혼도, 그 어떤 것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무덤덤해지는 우리의 마음을. 결국 행복은 내가 원하는 대상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닌 겁니다. 그 대상을 가졌을 때의 내 마음의 상태, 지극히 만족하고 더이상 원하는 것이 없어지는 그 상태에 있는 것일 텝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는 행복이란 것은 이처럼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이루는 과정에서 겪는 희로애락 속에서 잠시 축복처럼 주어지는 만족한 상태의 느낌,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어쩌겠습니까. 익숙한 이 행복의 길, 행복의 추구에 저는 의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의심 가득한 제 마음은 이미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의 경험처럼 행복이 무조건적으로, 아무 이유 없이 느껴질 수 있는 것이라면 행복을 바깥의 조건에서 찾을 필요가 있나? 계속해서 무언가를 성취할 필요가 있나? 행복을 내 안에서 찾는 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이 있는 걸까?


지금에서야 이렇게 제 마음을 돌아보고 조금이나마 정리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이렇게 논리적으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당시의 저는 그저 그날의 경험이 너무 그리웠고 다시 그때처럼 완전한 평화에 영원히 자리 잡을 수 있는 길이 있지 않을까 하는 그 생각뿐이었습니다. 또 다른 의미의 "추구"가 시작되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끈질기고도 은근한 "내 안의 행복"에 대한 추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참 재미있는 일이지요. 추구하는 걸 멈추는 것을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것 말입니다. 당시에는 이 아이러니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때부터 명상을 시작했고 은근하지만 끈질긴 마음 공부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서서히 바깥에서 행복을 찾는 습관을 내려놓기 시작합니다. 책에서 읽었던 대로 마음을 계속 현재로 돌리는 연습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늘 바깥을 바라보고, 미래의 목표를 바라보고 있던 시선을 돌려 일상 속에서 현재에 존재하며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그저 받아들이는 시간들이 늘어갔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내 마음의 상태를 살피는 것이 익숙해지게 됩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바깥의 상황들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글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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