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 깊은 곳의 직관의 소리를 구분하는 법
지난 글 <아디야 샨티 침묵 명상 수련>에서" 스스로를 믿으라"라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겼다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스스로를 믿으라는 말의 뜻 대해 조금 더 자세히 풀어 보겠습니다. 아디야 샨티가 이 주제에 대해 직접 설명한 유튜브 영상이 아래 링크에 있고 자막을 한글로 설정해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2kBzr5i_QY
우리가 스스로를 믿는다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끊임없는 의심과 스스로에 대한 불신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의심하고 불신하는 스스로를 믿는 것은 어려운 일 일뿐 아니라 어리석은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두려움에 잠식당한 상태의 작은 머리로는 깊은 우리 내면의 진실을 헤아릴 수 없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향한 용기를 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스스로"에 대한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아디야 샨티의 영상 50초쯤에 설명된 것처럼 여기서 "스스로"는 작은 나, 조건화된 내가 아니라 내 영혼, 즉 깊은 내면의 진실을 뜻합니다. 조건화되고 한계 지어진 내 생각이 아니라 나의 영혼의 소리를 믿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영혼의 소리라니, 이거 참 황당하고 허황된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가볍게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깊은 나의 내면의 소리, 직관의 느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직관의 느낌은 생각 너머에서 옵니다. 지난 글 <지금 이 순간의 비밀>에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본래 존재는 생각 너머에 있습니다. 지금 이 몸뿐만 아니라 훨씬 크고 광대하고 주변의 모든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그 어떤 것입니다. 본래 존재는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과거와 미래는 그저 우리가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일 뿐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오로지 현재, 무한하고 광대하게 펼쳐진 끝없는 지금 여기 이 순간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현재에 머무를 때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라는 문을 통해 직관의 통찰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직관의 소리를 따르는 것이 현명한 이유는 그것이나의 조건화된 생각, 의견, 판단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건화된 습관적 생각의 패턴은 과거의 지배를 받습니다. 과거 경험으로부터 학습된 믿음과 판단을 진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무수한 가능성에 열려있지 않습니다. 익숙하고 위험이 적다고 믿는 방향으로, 반복되는 패턴으로 회귀합니다.
살아가면서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느껴보신 적 있으신가요? 삶에서 같은 문제와 어려움이 자꾸 반복된다면 그 근저에는 고착화된 믿음이 있을 것입니다. 습관적인 생각과 행동의 패턴을 창조해 내는 핵심적인 믿음이 자리 잡고 있어 그것이 현실을 창조합니다.
조건화 지어진 작은 나는 스스로를 다른 모든 것들과 독립적인 존재로 보고 자기 경험과 해석에만 근거한 생각으로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우리 모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의 틀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입니다. 작은 나로 존재할 때 한가지 면만 보게 되는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이 옳음을 주장합니다. 자기 견해에 대한 집착이 괴로움을 일으킬 때도 그렇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어리석음이 괴로움의 원인이라 하신 것이 이런 의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가 견해를 갖는 것이 마치 나쁜 것처럼 들릴 수 있겠는데 그런 뜻은 아닙니다. 우리의 사고가 그저 그렇게 작용하니 그것이 괴로움을 자아내는 지 잘 살펴야한다는 뜻입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나타난 내 안의 조건화된 생각의 패턴을 비난하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그 작용을 이해하고 나의 마음을 잘 다스리고 넘어설 때 우리가 진정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직관의 소리를 조건화된 내가 내는 소리와 구분하는 방법은 내 마음의 상태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직관의 소리는 내면의 고요함에서 나옵니다. 생각의 장막이 거두어지고 마음이 고요함 속에 머무를 때 드러나는 작은 속삭임, 그리고 미세하게 충만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직관의 느낌은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아디야 샨티가 영혼의 소리에 대해서 한 말처럼 (2:12) 그것은 가장 간단한 지침을 제공할 뿐입니다. 직관은 내용을 정당화하거나 근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지적이고 분석적인 생각이 아니고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머리에서 느껴지기보다는 몸 전체에서, 그리고 가슴에서 느껴집니다. 끊임없이 분석하고 정당화하는 분주한 목소리가 가라앉을 때 내면의 깊은 고요함에서 나타나는 작은 속삭임입니다.
이유 없이 그저 그래야 할 것 같은 느낌. 그냥 그러고 싶은 느낌. 그게 다입니다.
직관의 목소리를 따르기 시작했을 때 한 가지 어려웠던 점은 다른 사람들에게 제 결정을 설명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애초부터 이유도 없었고 설명도 필요하지 않은 결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납득하도록 설명하는 것은 직관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타인에게 설명을 하다 보면 조건화된 의심이 다시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설명이 잘 되었다고 생각해도 타인은 자기 생각대로 왜곡해서 해석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럴 때는 그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그대로 두는 편이 낫습니다. 애쓸수록 의심과 오해만 더 커지기 때문입니다.
조건화된 작은 나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기반해 있습니다. 의무감이나 강요의 느낌이 든다면 조건화된 목소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태생적으로 나는 혼자 동떨어진 존재, 불완전한 존재라는 믿음에서 탄생된 생각의 패턴이기 때문에 늘 불안합니다. 시장에서 엄마 손을 놓친 어린아이의 마음입니다. 끊임없이 정답을 찾아다니며 주변의 이야기에 휘둘립니다. 엄마가 바로 뒤에서 항상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언제나 확실하고 안전하고 익숙하다고 느껴지는 길만 찾게 됩니다. 그런 길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있을 거라고 믿으며 찾아다니는 편이 차라리 편합니다. 가슴에서 올라오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머리가 나섭니다. 스스로의 불안한 결정에 확신을 주기 위해 생각이 많아집니다. 끊임없는 설명을 만들어내는 동안은 잠시나마 불안감을 잊을 수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두려움은 반복해서 재생됩니다.
직관의 소리에 익숙해지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몸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겁니다. 우리의 몸은 훌륭한 진실 탐지기입니다. 우리가 내면의 진실 속에 존재하지 않을 때 몸을 가만히 느껴보면 가슴이 닫히는 느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몸이 수축되고 불편한 느낌이 있다면 우리의 생각이나 결정이나 행동이 내 깊은 내면이 원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불편함이 나쁘다거나 불편함을 무조건 피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불편함은 진실에로의 초대장일 수도 있습니다. 불편함이 있다면 내가 지금 내리려는 결정이 혹시 나의 편향된 생각 때문에, 혹은 주변의 기대나 의무감, 또는 불안감 때문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돌아보라는 신호로 여기면 될 것입니다.
직관의 느낌은 가슴이 열리고 은은한 설렘이 느껴집니다. 물론 불확실해 보이는 길을 가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처음에는 당연히 불안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느낌은 불안한 마음을 넘어서는 호기심과 흥미진진함을 동반합니다. 모험심 한 스푼에 용기 두 스푼도 들어갑니다.
꼭 이래야 한다고 강요하는 느낌이 아닙니다. 아주 작은 속삭임이어서 무시하고 넘어가기도 쉽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본래의 자리에서는 사실 모든 것이 다 괜찮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잘못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나 혼란스러움 역시 우리를 성장시키는 소중한 경험임을 알고 있기에 우리 삶의 여정을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지지하고 지켜봐 주는 느낌입니다.
제가 고작 5개월 휴직을 하면서 미국에서 소유하던 집들을 모두 팔겠다고 결정했을 때 주변의 모두가 그 결정에 의문을 가졌었습니다. 스스로도 이성적으로는 도저히 납득을 할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세입자들이 모지기를 갚아 은퇴 자금을 마련해 줄 집들이었습니다. 고작 5개월 한국에 다녀온다는 사람이 노후 대책으로 준비해둔 집 네 채를 몽땅 파는 건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내놓지도 않은 집들을 사겠다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을 때 가슴으로 분명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삶이 원하는 길이라는 것을. 이것이 모두를 위한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제 가슴이, 직관의 느낌이 그것을 분명히 이야기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지금 펼쳐지는 신기한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호기심 가득한 설렘으로 다가왔습니다. 때로는 살고 있는 집을 사고 싶어 하는 세입자들에 대한 가슴 가득한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때로는 집들을 관리하느라 스트레스 받고 힘들어했던 남편에 대한 깊은 연민으로 드러났습니다. 때로는 가슴이 활짝 열리는 편안함을 동반한 확신과 명료함으로 나타났습니다.
직관의 느낌을 따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 후 우리 가족은 5개월이 아니라 제주에서 축복 같은 3년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연장된 휴직 기간 동안 코로나가 발병했고 미국에서 있었더라면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을 아이들이 제주의 작은 학교를 다니며 건강하고 행복한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 시기에 한국의 편리한 건강 검진 시스템 덕분에 남편의 암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시기에 미국에 있었더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겁니다. 한국의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최고의 병원과 의사에게서 수술을 받고 남편이 무사히 회복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집을 팔고 남은 돈을 투자했던 것이 잘 되어서 오히려 몇 년 더 일을 하지 않고도 편히 쉴 수 있는 수익을 얻게 되었습니다. 깊은 내면의 직관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길이 모두에게 최선의 길인지를.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인지를.
지금도 저는 직관의 느낌을 따라 불확실해 보이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2년의 휴직 끝에 또 다시 승진의 기회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직관의 느낌을 따라 승진 대신에 퇴사를 선택했습니다. 그 후 일면식도 없는 푸에르토리코로 이주하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언제나처럼 늘 미래는 불확실합니다. 예전에 확실하다고 믿었을 때도 불확실했습니다.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든 안 믿든 미래는 늘 불확실합니다. 하지만 직관을 따르는 경험이 쌓이면서 저에게는 용기 세 스푼이 생겼습니다. 스스로를 믿게 된 것입니다. 삶을 믿게 된 것입니다. 삶은 계속해서 느낌을 통해 있지도 않은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걸음 한걸음을 뗄 때마다 직관을 따르는 여정에 대한 믿음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아디야 샨티의 영상에서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6:50) 스스로를 믿는 방법을 머리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현재에 머무르며 몸의 느낌에 주의를 기울이며 나의 영혼의 느낌을 알아차리기 위해 나의 깊은 내면에 관심을 기울여 주는 것, 그것에서 출발하면 됩니다. 마음이 열려있을 때 충만함을 느끼면 그저 느껴지는 그 길을 따라가 봅니다. 작은 것이라도 그 느낌의 신호를 따라 행동해 보고, 자연스러운 삶의 펼쳐짐을 목도합니다. 조금씩 내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내 영혼이 원하는 삶이 펼쳐지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면서 점점 균형을 찾게 됩니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믿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