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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선생 Jan 11. 2024

틀을 내려놓기 (Feat. 푸에르토리코)

푸에르토리코에서 만난 여유


한국을 출발한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벌써 이곳의 기후에 익숙해졌습니다. 제주 바람의 매서움은 이미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후덥지근한 푸에르토리코에선 늘 바람이 반갑습니다. 이곳에선 거의 매일 열심히 불어 재끼는 바람에 커다란 야자수 나무의 잎이 성숙한 여인의 머리처럼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이 걱정보다는 여유를 선사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나무



태어나 한 번도 추울까 걱정해 본 적 없는 지역의 국민성에 여유가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겝니다. 처음 왔을 때 모든 일에 느긋한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 신기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곳 사람들은 드라이브 쓰루에서 차 안에 앉은 채로 30-40분은 거뜬히 기다리는 게 일상입니다. 우리 가족이 주차하고 식당 안에 들어가서 주문하고 음식을 받아 나올 때까지도 같은 시각에 도착했던 다른 차는 여전히 드라이브 쓰루에서 줄의 절반에도 도달을 못해 있습니다. 그러나 차 안에 앉아 있는 그 누구도 안달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일이 전혀 답답한 일이 아닌 표정들입니다. 성질 급한 우리 한국 사람들이 보면 기함할 일입니다. 


급한 성질 그대로 푸에르토리코에서 살아 가려 한다면 괴로운 일들만 가득할 것입니다. 나의 계획 이대로 일이 진행되리라는 기대는 일찌감치 내려놓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에 푸에르토리코에 와서는 모든 일이 비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 낭비가 너무 많다고만 생각해서 답답했습니다. 지금은 이곳의 생활 습관에 익숙합니다. 시간에 대한 관념이 다르구나 이해했습니다. 대신 이곳의 여유로움이 보입니다. 그래서 이곳에선 모든 것을 천천히 진행할 마음을 먹게 됩니다. 


작년에 푸에르토리코 거주 자격을 얻기 위해 수리가 필요한 집을 하나 구매했을 때만 해도 집수리하는 것이 그렇게 오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3개월이면 가능하다고 장담했던 업자는 4개월 후 우리가 이사를 들어갈 때까지도 보일러 수리를 마치지 못해서 찬물에 샤워를 해야 했습니다. 반쯤 리모델링을 진행하다 마무리 짓지 못한 화장실들을 버려둔 채 남은 화장실 하나만 사용하며 그 집에서 두 달을 더 살고서도 일이 다 마무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수리가 완료된 작업도 다시 해야하는 일이 일쑤였습니다. 결국 일부 작업은 포기하고 한국에 들어와야 했고 작년 1월에 시작한 집 수리는 지금도 진행형입니다. 


아직도 수리가 필요한 화장실 


푸에르토리코의 건축 일꾼들은 홍길동입니다. 나타났다 사라졌다 언제 어디서 나타나서 무슨 일을 하다가 또 언제 어디로 사라질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나중에알고 보니 일용직으로 일하는 사람들 사는 패턴이 원래 그렇답니다. 한 며칠 일하고 돈이 생기면 그 돈이 떨어질 때까지 쉬고 논답니다. 놀고 나서 돈이 떨어지면 또 일을 합니다. 일하다가 수가 틀리면 그만 두기도 일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고용했던 중간 책임자는 이게 다 푸에르토리코 식이랍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해해 보려는 시늉이라도 하니까 덜 답답하답니다. 미국에서 갖 이주해 온 사람들은 중간에 낀 자기를 달달 볶는다는 겁니다. 


여러 가지 다른 문화에서 살아보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나의 틀을 돌아보게 되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이래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돌아보게 되는 때가 많습니다. 한국에서 당연한 것이 여기에선 전혀 당연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반면 여기에서 당연한 것들이 한국에선 전혀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나 둘 내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다 보면 조금 더 자유로워집니다. 꼭 이래야 한다는 마음의 틀이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마음속 자유와 평화의 크기도 조금씩 커집니다. 어느 문화건 어떤 일이건 꼭 이래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일에는 양면성이 있으니 기왕이면 좋아하는 점을 보며 사는 편이 현명할 것입니다.  


예전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았던 한 가족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가족은 멕시코, 미국, 일본,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 거주하며 살았답니다. 그 가장이 젊었을 때 멕시코에 교환학생으로 홈스테이를 하고 있던 때의 일이랍니다. 


어느 날 집주인 아저씨가 냉장고를 등에 짊어지고 어디론가 가고 있더랍니다. 어디를 가냐고 물었더니 냉장고를 팔아서 가족이 여름 휴가를 떠나기로 했답니다. 깜짝 놀란 남자가 그럼 나중에 돌아와서는 냉장고도 없이 어떡할 거냐고 물었더니 그 아저씨 대답이 가관입니다. 


"참내, 이 답답한 꼬레아노야 (한국인아).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는 거지. 그때 일을 지금의 내가 미리 걱정할 필요가 뭐 있나."  


이 이야기를 듣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이거였습니다. 그동안 푸에르토리코에서 왜 그렇게 이상해 보이는 때가 많았나가 바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예전에 괴로운 일이 있었을 때 자연의 입장에서 이 일을 어떻게 볼까, 우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생각해 보고 나서 고민하던 것이 별것 아니구나 편안해졌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는 우주까지 갈 필요도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 이 일을 어떻게 볼까만 생각해 봐도 될 것입니다. 내 아이가 대학을 못 가서 고민이라면 이곳 사람들에게 문제가 될까 생각해 보는 겁니다. 직장에서 승진이 안되서 고민이라면 하루동안 번 것을 다 쓰며 다음 날을 즐기는 푸에르코리코의 기술자들을 생각해 보면 될 겁니다. 미래가 불안하게 느껴진다면 오늘 당장 냉장고를 팔아 휴가를 떠나고 내일의 어려움은 그때 가서 해결하겠다는 멕시코의 홈스테이 아저씨를 떠올려 보면 될 것입니다. 


사실 그 어떤 문화도 더 옳고 그른 것은 없습니다. 그저 여러 다양한 삶의 방식이 존재하는 것이고 모두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약 지금 나의 삶이 괴롭게 느껴진다면 나의 문화에서 조금 벗어나서 내 문제를 돌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내가 가진 틀로 인해 스스로 짓고 있는 괴로움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을 겁니다. 똑같은 상황에서도 모두가 똑같이 괴로운 건 아니라는 사실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 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푸에르토리코의 여유로운 바람이 오늘 제게 전해 준 소식입니다. 



Mount El Yun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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