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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Nov 01. 2019

#35. 흩어지는 물결일지언정, 선생님

2019.11.01.

여행에 대한 로망을 처음 갖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다. 아마도 같이 살던 막내 고모가 사두었던 것 같은데, 어느 날 우연히 만화책으로 가득한 내 책장에 꽂혀있던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이라는 책을 들춰보았다. 줄글을 읽는 데에 익숙지 않았던 탓에 완독까지 약 한 달 여가 걸렸는데, 그때 인도에 꼭 봐야지, 타지마할을 꼭 이 두 눈에 담아야지, 하는 다짐이 마음 한구석에 단단히 자리를 잡았다.


뉴델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건 스물한 살의 늦여름이다. 당시 입대를 앞두고 있었기에, 그게 뭐 자랑이라고 참, 보무도 당당하게 부모님께 “나 군대 가기 전에 인도 보내주세요.”하고 손을 벌렸다. 삼주 간 체류했는데 원체 소심한 겁쟁이인데다 그땐 아직 사회화도 덜 된 시기라 인상에 크게 남는 여행은 아니었다. 그래도 타지마할은 정말 놀라웠고, 나처럼 류시화의 글을 보고 그곳에 환상을 품은 사람이 꽤 있었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인도 다음으로 꿈의 목적지로 삼게 된 곳이 우유니 소금사막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전형적인 루트여서인지, 괜히 조금 부끄럽기도 하다. 역시나 책을 통해서였는데, 군대 첫 휴가에서 복귀할 때 구입해 들고 복귀했던 책 중에 박민우의 <1만 시간 동안의 남미>라는 여행기가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소금사막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의 여정을 텍스트와 사진으로 따라가며 자연스레 볼리비아를 내 인생의 버킷에 담게 되었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대지 위에 바로 작년 오늘, 두 발을 디뎠다. 회사에서 3년 만근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2주의 안식주를 주었기에, 페루로 들어가 볼리비아를 거쳐 칠레에서 마무리하는 남미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던 덕분이다. 고산병 증세로 고생했지만 마추픽추도 똑똑히 보고 우유니에서 타임랩스 영상도 찍고 아타카마 사막에서 천문 투어도 했던, 무지하게 힘들었던 만큼 근사한 순간도 많았던 시간이었다.


소금사막은 장관이었지만 엄청나게 황홀하거나 감격스럽지는 않았다. 되려 약간은 시큰둥하고 시니컬한 심사가 되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였을까, 집이 그리워서였을까, 십여 년을 품고 있던 로망이 이루어지는 게 어쩐지 허무해서였을까.


언젠가 맷 데이먼이 스물일곱의 나이에 <굿 윌 헌팅>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거머쥔 날을 회상하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그날 밤 그는 거실에서 트로피를 바라보며 이걸 얻기 위해 아무도 엿 먹이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다, 이렇게 일찍 이걸 받게 된 건 큰 축복이다, 만약 평생 이 상을 좇다가 가슴속에 오스카로도 채워지지 않는 거대한 구멍이 있음을 노년에 이르러서야 깨달았다면 얼마나 허망했을까를 상상하니 끔찍하다,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나도 그와 비슷한 심정이었을까? 여전히 모르겠다.


로망(Romance)를 어원으로 하는 우리말 단어는 물결 낭(浪)과 흩어질 만(漫)이 결합된 낭만이다. 중학교 국어 시간에 선생님이 이 낭만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로망의 발음을 국어로 표기하기 위해 아무 의미 없는 한자어를 붙여놓은 것이라고 설명해주셨었다. 그러니까 학창시절의 낭만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 고 덧붙이셨던가.


하지만 선생님, 흩어지는 물결일지언정 일단 붙잡고 봐야 안되겠습니까. 그래야 허무한지 허망한지 황망한지 아니면 진짜 황홀한지 알 것 아닙니까. 낭만의 참맛을 보기 전과 후의 나는 분명 다른 사람일 테니까요. 그마저 물결이 흩어지듯 금세 사라져버릴지라도 말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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