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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Nov 04. 2019

#36. 해피 익스트림 트래킹 데이

2019.11.03.

소중한 사람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로 표현 가능할 테지만, 굳이 나만의 답을 내려본다면 이렇다. 내가 기꺼이 시간과 돈과 체력을 쏟을 수 있는 존재. 만약 그리하지 못하게 된다면 부채감과 죄스러움을 느낄만한 대상. 인생은 언제나 등가교환이라 누가 말했던가, 난 오늘 그동안 쌓인 빚을 탕감한 대가로 내 도가니를 내주었다. 참으로 긴 하루였다.

정확히 새벽 여섯시 사십 사분에 눈을 떴다. 조금만 더 누워있을까, 했지만 내뱉은 말이 있었기에 사력을 다해 기상해 이불을 개켰다. 어슴푸레한 빛이 감도는 거실의 소파엔 이미 채비를 완벽하게 마친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사뭇 설렌 표정의 그에게 잠시만 기다려달라 청하고 부랴부랴 머리를 감고 옷을 갈아입었다. 가시죠, 그래, 가보자.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당부하며 허허 웃는 그는 오늘로 육십하고도 한 번째 생일을 맞이한, 나의 아버지다.

그는 걷기 마니아다. 근데 뭐랄까, 그 즐김의 강도가 좀 심하다. 옛날부터 그랬다. 과장 좀 보태서 등산이든 산책이든 나가면 들어올 줄을 모른다. 지난주에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였더라, 아무튼 하정우 저리 가랄 정도로 긴 거리를 혼자 걸었다 했다. 다음 주에는 당일 마무리한 지점을 스타팅 포인트로 삼고 속행하겠다고 하길래, 특별한 날이니만큼 한 번 같이 가드려야지 싶어 합류 의사를 표명했다. 나름 체력에 자신도 있고 걷기도 썩 좋아하는 편이고, 무엇보다 시간을 선물해야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전철을 두어 번 갈아타고 뚝섬한강공원으로 갔다. 그때가 아침 8시쯤이었는데 몇 시간 예상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네 시간만 걷자, 고 답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강변을 우측에 두고 앞으로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경치가 멋진 벤치가 있어 잠시 앉아 귤을 까먹은 이십 분 외에는 쉼없이 주욱 걸었다. 경기도 구리시를 횡단해 남양주로 진입해 경의중앙선 덕소역에 당도하니 오후 한 시가 다 될 무렵이었다. 지친 기색 하나 없는 그.

덕소역 근처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팔당역까지만 가볼까 하다가 다음 일정을 위해 귀가길에 올랐다. 전철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노라니, 그가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결코 티를 내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의 보이스카우트 준비물을 사려고 종일 발품을 팔고 돌아와선, 조용히 안방에 이부자리를 펴고 눕던 그. 그날 그는 담석으로 입원해 배를 갈랐다. 미련한 양반 같으니라고….

저녁엔 누나 매형 조카들 모두 모여 방어회를 먹었다. 초도 불고 노래도 부르고, 예린이와 도준이의 난장을 한바탕 치르고 나니 어느덧 밤 열 시. 계속 놀겠다고 버티는 예린이를 어르고 달래서 집까지 바래다준 후에야 그는 한숨을 돌리는 모양이었다. 아, 하나 더 있구나. 실내에서는 웬만해선 쉬를 하지 않는 마롱이를 위한 밤산책.

이토록 바쁜 하루를 보냈음에도, 내일도 그는 어김없이 동이 트기 전에 눈을 뜰 것이다. 그리고 뒷산을 두어 시간 거닌 뒤 일과를 시작할 것이다. 조카들과 마롱이를 돌보는 데에 전심전력을 다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는 늘 자신의 시간과 체력을 다른 이를 위해 쏟고 있다. 스스로를 위해 시간과 체력을 쓰는 건 어쩌면 걸을 때뿐인지도.

에휴, 이번 한 번으로 끝낼랬더니 안되겠다. 종종 동행해야지. 그리고 사진으로 남겨야지, 그가 온전히 본인에게만 집중하는 그 흔치않은 모습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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