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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Nov 25. 2019

#44. 효자 코스프레는 영화관에서

2019.11.23.

이따금 ‘효자 코프스레를 해야 할 때’라는 감각이 찾아온다. 기본적으로 나이 서른을 훌쩍 넘어 부모님께 얹혀살면서 가사 노동을 포함한 여러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처지인지라, 주기적으로 무어라도 하면서 빚을 덜어 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가장 쉽게 손이 가는 선택지는 역시나 영화관이다. 오전에 영화 한 편 보고 식사를 한 뒤 빠이빠이하면 딱 깔끔하다.

오늘도 그리했다. 조조영화로 정지영 감독의 <블랙머니>를 봤다. 불과 이틀 전 감상한 걸작 중의 걸작 <아이리시맨>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던 탓인지, 상영 내내 불만스러운 구석들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영 재미가 없지는 않았고, 부모님이 조진웅 배우의 연기에 시종 빵빵 터지며 즐거이 관람하셔서 만족스러웠다.

상영이 끝나곤 기념사진을 찍어드렸다. <러브 앳>이라는 영화의 프로모션을 위해 만든, 에펠탑이 보이는 파리를 배경으로 벤치가 놓인, 포토스팟이 있어 그곳에서 찍었다. 카메라로 몇 번 휴대전화로 또 몇 번. 식당으로 가려는데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분이 촬영을 요청해 무릎까지 꿇고 열심히 찍어드렸다. 괜한 동질감에 더 그랬나 싶다.

영화와 관련해서 엄마와 아부지 둘에게 각각 놀랐던 경험이 있다. 엄마는 자타공인 대단한 씨네필이어서 부산에 살 땐 1회 부국제부터 매년 그 시즌에 휴가를 내고 영화제를 즐기셨다. 현장에서 만난 전국 각지의 영화동지들을 우르르 몰고 와서 집에 재운 적도 다수다. 집 근처 요트경기장에 있었던 조그마한 예술영화관이 열악한 재정으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자, 얼마 간의 기부를 해서 지역신문에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여러 일화 중에서 압권이었던 건, 허리디스크로 거동조차 힘겨워하던 엄마가 죽을 상을 하며 옷을 챙겨 입고는 “털보야, 도저히 안되겠다. 엄마 영화관 좀 다녀올게.”하며 길을 나서던 순간이다. 당시 난 고등학교 1학년이는데, 별다른 말을 얹지 못하고 그저 무사히 다녀오시라 한 마디만을 남겼던 기억이 난다.

젊을 적부터 왕성하게, 가끔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열성적으로, 문화생활을 향유하던 엄마와 달리 아부지는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요즘이야 매일같이 유튜브를 시청하는 애국보수(…)의 일원이지만, 차치하고 문화적인 소양이나 구력과 같은 소위 문화력(力)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닌 것이다.

그래도 종종 영화관을 방문하거나 TV로 이런저런 작품들을 보며 그가 툭툭 내뱉는 한 마디에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부분을 캐치하거나, 내 판단과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할 때다. 물론 정제된 문장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럴 때마다 ‘아부지한테 제법 예리한 구석이 있네.’라고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는다.

어쩌면 내가 그를 너무나도 모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는 이런 사람이고, 그러니까 그는 이러한 성향을 갖고 있을 것이고, 따라서 이렇게 생각을 하겠지, 하는 식으로 그를 단편적으로 해석하고 있었는지도. 필시 그럴 테지.

사진을 다시 보니 새삼 두 사람이 참 많이도 늙었다는 게 느껴진다. 딱히 마음이 무겁거나 애잔하거나 그렇지는 않다. 다만 뭐랄까, 좀 미안한 기분? 다음 달에는 <포드 V 페라리>를 보러 가야지. 가능하면 4DX로다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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