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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Dec 05. 2019

#50. 치트키는 사기(士氣)

2019.12.04.

중국 전국시대 말기를 배경으로 진나라가 중화를 통일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하라 야스히사의 만화 <킹덤>은 뛰어난 작화와 박진감 넘치는 전개로 일본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렇다고 작화가 다크한 섬세함의 극치인 미우라 켄타로의 <베르세르크>나 우아하기 짝이 없는 이노우에 타케히코의 <배가본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호쾌한 액션씬과 영리한 전쟁 묘사는 최고급이라 평할만하다. 혼돈과 전란의 시대를 다루다 보니 당연하게도 전투는 끊이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그 과정에서 크고 작은 위기를 맞이하지만 번뜩이는 기지와 용기로 그것을 격파하며 성장해나간다. 전형적인 일본식 왕도 소년만화의 내러티브다.

이따금은 솟아날 구멍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칠흑 같은 난관에 봉착하기도 한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초나라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그런 상황. 여기서 일종의 치트키처럼 사용되는 게 있는데, 바로 ‘사기(士氣)’다. 장군은 병사들을 모아두고 연설을 한다. 내가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도록 힘을 빌려 달라고, 지금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건 우리 밖에 없다고, 반드시 살아서 다시 만나자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대지를 울린다. 병력은 딸려 군량은 부족해, 원군마저 기대하기 힘든 절체절명을 기세 하나로 뚫어내겠다는 것이다.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 지푸라기가 의외로, 아니 늘 무쇠로 만든 동아줄이 된다. 사기(士氣)가 사기(詐欺)를 치는 격이다.

만화에서와 같이 극적인 효과가 매번 발동하지는 않겠지만, 사기가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점에는 수긍이 간다. 농구나 축구 등 단체 스포츠를 할 때 우리팀에 파이팅이 넘치는 인원이 한 명이라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차이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 실력이 웬만큼 압도적이지 않고서야, 함께 업무를 하고 싶은 동료의 요건 1순위는 주위를 치어 업하는 소위 ‘긍정 버프’를 두른 사람일 테다. 인간이 본디 감정의 동물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치다.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오늘은 사십 대 초중반의 기혼 여성 두 분과 점심 식사를 했다. 자연스레 결혼 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 만약 결혼을 한다면 상대가 꼭 갖추었으면 하는 요소가 무어냐는 질문을 받았다. 한 분은 ‘얼굴을 뜯어먹고 살겠다’고 진작에 결심을 했기에 그에 딱 들어맞는 이를 남편으로 맞이했고, 또 한 분은 ‘이것저것 고려했더니 큰 하자가 없던 남자’가 반려자가 되었다고 했다. 나는 “저도 외모요.” 말한 뒤 덧붙였다. “그런데 그것만큼 밝은 성격도 진짜 중요할 것 같아요.” 두 분은 곧장 입을 모아 ‘살아보니 그게 제일’이라고 맞장구를 쳤다.

하긴, 어디 부부 사이뿐이랴. 모든 관계는 감정 노동을 전제로 할 것이다. 누구나 명암을 갖고 있을 텐데 자신도 상대도 다운되지 않도록 가능한 쾌활함을 유지하는 이는 그야말로 감정 노동의 역군으로 추앙받아 마땅하다. 이 생각은 배우자의 무기력과 무심함 그리고 냉소가 주는 고통에 대해 들으면 들을 수록 더더욱 강해졌다. 불한당이었던 지난 날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함께···.

축구단을 운영하는 게임 ‘풋볼 매니저’에 한창 빠져 살던 2007년, 시작과 동시에 항상 영입했던 두 선수가 있다. 레알마드리드의 구티와 AC밀란의 가투소다. 구티는 상상을 초월하는 창의성을 자랑하는 판타지스타이고 가투소는 불굴의 투지를 지닌 보디가드다. 전자는 우아함으로 후자는 열정으로 팀의 사기를 북돋는 존재다. 나는 죽을 때까지 한순간이라도 구티가 되어보기를 꿈꿀 것이다. 하지만 기꺼이 가투소가 되는 길도 훌륭하다 믿고 그리해볼 것이다. 장르는 달라도 둘 다 아름다운 건 매한가지니까. 게다가 둘 다 엄청난 미남자들이니까. 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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