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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Dec 09. 2019

#52. 내일도 물을 올릴 자리

2019.12.07.

<무한도전>의 열렬한 신봉자였다. 황소와 줄다리기를 하고 지하철과 달리기 경주를 하던 초창기부터 자타 공인 국민예능으로 자리 잡고 하나의 사회현상을 기능하던 전성기를 거쳐, “요새 누가 무도 보냐”라는 말이 심심찮게 흘러나오던 쇠락기와 자못 씁쓸했던 마지막까지, 단 하나의 에피소드도 빼놓지 않고 시청했다. ‘이경규 특집’이나 ‘죄와 길’, ‘레슬링 특집’ 및 추격전들은 여태 못해도 스무 번 이상은 돌려봤다.

반면 <무한도전>과 주말을 양분했던 또 하나의 국민예능 <1박 2일>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진성 무도빠를 자처하던 터라 괜한 라이벌 의식을 느끼기도 했고, ‘소리나 지르고 복불복 게임이나 반복하는 저런 촌스럽고 야만적인 걸 뭐가 좋다고 보냐’하며 은연중에 방송과 그 시청자들을 무시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이 주구장창 외쳐대는 ‘나만 아니면 돼!’ 소리가 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평을 한 적도 있다. 사실 그건 무도도 마찬가지였는데 그쪽엔 질끈 눈을 감고서.

그런데 요즘 <1박 2일>을 조금씩 보고 있다. 유튜브에 업로드되는 편집본을 틈틈이 하나둘 클릭 있는데 이게 꽤나 재미있다. 그간 <신서유기>를 비롯한 나영석 PD의 ‘1박 2일류’ 예능에 익숙해져서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원래부터 재미있는 방송이니까 재미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삼시세끼 어촌편> 이후로 나PD의 방송을 거진 다 섭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그의 ‘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최근에 그 믿음이 조금 흔들리고 있다. <라끼남> 때문이다. 라면을 사랑하는 남자 강호동이 가장 맛있는 라면을, 라면이 가장 맛있는 환경에서 ‘끼려 먹는’ 모습을 담는 그런 프로그램이다. 지난주에 첫 화가 방영되었는데 확인해보니 벌써 조회수가 110만 회가 넘었다. 대단한 기세다.

아무튼 <라끼남>을 보면서 뭐랄까, ‘무언가를 순수하게 사랑하는 일의 위대함’을 체감했다. 대중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일과 라면을 사랑하는 강호동,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방송을 만드는 일을 사랑하는 나영석 사단,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연기자와 제작진 사이 형성된 굳건한 신뢰까지. 기회만 주어진다면 그들을 아주 장시간 인터뷰를 해보고픈 마음이 들 정도다. 특히 ‘라면 끼리는 남자’ 강호동을.

그래도 그들이 그저 부럽지만은 않은 것은 내게도 무언가를 함께 만드는 동료와 그들과 어깨 걸고 쌓아온 역사가 있기 때문일 테다. 내겐 <무한도전>, <1박 2일>, <라끼남> 부럽지 않은 <영화식당>과 <시시콜콜 시시알콜>이 있기 때문일 테다. 이따금은 우리의 창작물을 진짜로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일 테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오기로 <영화식당>을 듣는다는 썰이 있으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2012년부터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고 있는 페퍼, 중학생 때부터 <영화식당>을 들은 것은 물론 <시시콜콜 시시알콜>도 빠짐없이 챙겨 듣는다는 메이를 초대해 식사를 하고 녹음도 해버렸다.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신이 나서 한 시간 반이 지나도록 수다를 떨었다. 약간의 한기가 있었던 작업실은 녹음 시작과 동시에 금세 후끈후끈해졌던 것 같다.

어쩌다 보니 20대와 30대와 40대(만으로는 아직 30대!)가 모인 자리, 영화와 팟캐스트라는 공통점 또는 교집합 아래 옹기종기 앉은 자리, 더없이 유쾌하고 따뜻했던 자리. 앞으로도 힘닿는 한 라면을 끼려야겠다고 생각한 자리. 자, 내일도 모레도 물을 올리자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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