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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Dec 23. 2019

#54. 눈치껏 말고 마음껏

2019.12.11.

뮤지컬을 보고 있었다. 동행은 없었고 장내는 관객들로 가득했다. 극은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배우들은 커다란 성량과 몸짓으로 좌중을 압도했고 거대한 함선의 돛이 파도를 이루는 듯한 무대의 연출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 꽉 움켜쥐었던 두 주먹이 저릿저릿 해질 찰나, 바닥이 놓였던 카드가 일제히 뒤집히듯이 객석과 무대의 구분이 사라지고 드넓은 광장으로 합일되었다. 잠자코 앉아 있는 줄로만 알았던 관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립해 춤을 추기 시작했고, 어찌할 바 몰라 당황해하며 주위를 살피던 나는 저 멀리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작년 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였다.

굳이 시대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거구인 그는 새하얀 연미복을 차려 입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온몸을 흔들고 있었다. 주변의 군중들이 상대적으로 작았던 탓인지 그는 병아리 사이에 선 타조처럼 우뚝해 보였고, 아무리 내 기억을 헤집어 보아도 좀처럼 건져올릴 길 없는 환한 미소를 만면에 머금고 있었다. 캉캉을 추듯 한없이 자유롭게 길쭉한 양 다리를 앞으로 또 앞으로 내지르던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예의 그 무표정으로 회귀했고, 피부에는 저속 촬영 영상이 재생되듯 주름이 급박하게 새겨졌다.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깼다.

엄밀히 따지면 그는 내 친할아버지가 아니다. 아버지의 삼촌이니 촌수로는 나와 사촌이다. 하지만 그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으로 조실부모한 내 아버지가 어른이 될 때까지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연스레 나는 그를 친할아버지라 여기며 자라왔고 귀여움도 많이 받았다. 지금도 큰 편에 속하는 180cm의 장신이었던 그는 덩치도 상당해서 어디를 가나 눈에 띄는 존재였다. 자동차 제조업 현장이 삶의 터전이어서였는지 아니면 안동 촌놈의 특성이었는지 아무튼 어지간히도 고집이 강했다고 한다.

하늘로 돌아가기 몇 년 전부터 그는 부축 없이는 제대로 걷지 못했다. 근육량이 줄어들고 운동도 못하게 되니 시간이 갈수록 작아졌다. 어깨 선에 딱 맞게 각이 잡혀있던 양복이 헐렁해졌고, 그의 눈빛도 그만큼 허랑해졌다. 그런 모습을 손자에겐 보이길 원치 않았던 모양인지, 내가 병문안이라도 갈라치면 잠깐 반가운 기색으로 맞고는 “바쁠 텐데 얼른 가서 일 봐라.”시며 등을 떠밀었다. 언제나 중심에 있었던 집안 행사에서도 가장자리로 몸을 숨겼다.

그의 죽음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몇 있다. 그것은 나를 포함한 극소수의 사람만이 알고 있다. 꿈속의 그는 자신을 잡아 끄는 그 사실들을 벗어던진 듯이 보였다. 자유롭게. 나는 그의 비행을 망친 것이다. 우연찮게 내가 그의 천상몽(天上夢)을 들여다본 것이라면, 다시는 그곳을 방문하고 싶지 않다. 누가 등장하든, 누구에게나 악몽은 악몽일 따름이니까.

고백하자면 그를 향한 그리움이나 그의 최후에 관한 죄책감 같은 건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왜 그에 대한 꿈을 꾸었을까. 모르겠다. 다만 사라져야겠다, 그의 시야에서. 캉캉이든 지르박이든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추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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