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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Dec 24. 2019

#55.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할 곳에

2019.12.13.

출근길 만원버스 안에서 한참 스마트폰을 들여다봤다. 그다지 뛰어나지 않은 화질과 어수선한 구도, 시종 흔들리는 초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확히 내가 원하는 곳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분 내외의 짧은 영상 두 편을 하차할 때까지 두세 번은 돌려본 것 같다. 그동안 입술은 시종 반달 모양이었던지 광대가 아플 지경이었다. 입을 오물거리면서 안면 근육을 풀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지금 나를 보면 분명 애아빠로 여기겠구나.

어제는 예린이와 도준이의 재롱잔치가 있던 날이다. 회사 업무가 몰려 현장에는 가지 못했다. 화면으로나마 둘의 생애 첫 무대를 감상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하얀 레이스에 노란 망토, 반짝이 장식이 인상적인 꿀벌 의상을 입은 도준이는 처음엔 조금 율동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이쪽을 보며 울었다. 아마 앞에 선 친구의 대성통곡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싶다. 우리야 보기에 귀엽다만, 익숙지 않은 아이들에겐 커다란 고통일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되었다.

반면에 예린이는 껑충껑충 뛰고 노래도 부르면서 완벽하게 안무를 소화했다. 또래 보다 머리 하나쯤은 더 큰 아이라 제일 가장자리에 서있어서 세세한 표정 변화까지는 관찰하지 못했는데, 충분히 그 시간을 즐기는듯해서 마음이 따뜻했다. 그간 종종 보여주었던 자세들이 다 연습했던 것들이구나를 깨달으며 어린이의 습득력에 감탄했다. 재롱잔치의 타이틀이 ‘작은 별들의 재잘거림’이었는데, 반짝반짝하는 모습들이 선명한 별자리를 보는 양 감격스럽기도 했다.

퇴근이 다가오는 늦은 오후, 복도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가가 귀를 기울여보니 네 살가량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엄마 품에 안겨 꺼이꺼이 울면서 “엄마 미안해, 엄마 미안해.”를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입주한 층에 어린이집이 있는데, 그곳에서 오래도록 혼자 엄마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엄마가 늦게 와서 미안해.”하고 달래자 아이는 “일찍 온다고 해놓고 왜 늦게 왔어, 기다렸잖아.”와 “엄마 화내서 미안해.”를 번갈아 읊조리며 조그마한 손으로 엄마의 등을 쓰다듬었다.

귀가를 하니 예린이와 도준이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놀고 있었다. 어제 잘했냐고 묻자 예린이가 “삼촌은 안 왔잖아!” 일갈했다. 삼촌 뒤에서 다 보고 있었다고, 다시 한 번 해볼 수 있겠느냐 물으니 소파에 올라가 동작을 보여주었다. 발레복을 나풀거리며 방방 점프하는 예린이를 보면서, 꼭 오라고 말은 안 했지만 나도 반드시 가겠노라 약조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예린이가 내가 와주기를 기다렸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뒤늦게 미안함이 샘솟았다.

있어야 할 때, 있어야 할 곳에 있어주는 것이 사랑일 것이다. 가능한 그걸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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