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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Jan 05. 2020

#58. 엄마의 줄행랑 같은 이야기

2020.01.04.

언젠가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다. 소아마비로 인해 걷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엄마는 자식을 걷게 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대학병원도 가보고 한의원도 가보고 민간요법에도 의지해보고 몸에 좋다는 보양식은 다 챙겨서 먹여보았지만, 오래도록 아이는 두 다리로 서지 못했다.

몇 년을 허비하고 어느 재활원으로 아이를 보냈다. 공인된 의료기관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슷한 증상을 가진 환자들이 다수 효과를 보았다는 소문이 있었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재활원에 아이를 입소시킨 것이다. 몇 개월이 지난 뒤 엄마는 전화를 받았다. 와서 아이의 상태를 확인해보라는 연락이었다. 엄마가 재활원의 문을 열었을 때 아이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러나 온전히 스스로의 두 다리로 그녀에게 걸어왔다.

여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자연스레 엄마가 이런 반응을 했으리라고 생각했다. 당장 달려가 아이를 끌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겠구나. 하지만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오히려 엄마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다가오는 아이로부터 줄행랑을 쳤다고 한다. 단 몇 초라도 더 아이의 걷는 모습을 두 눈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일화를 접한 이후 훌륭한 이야기는 어때야 하는가, 어떤 이야기가 훌륭한 이야기인가를 곱씹게 되었다. 특히나 인간에 대한 관찰, 통찰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조조영화로 제임스 맨골드의 <포드 V 페라리>를 봤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침 일찍 길을 나선 보람이 차고 넘칠 정도로 대단한 영화였다. 이 영화에도 위 언급한 일화와 같이 내 예상을 보기 좋게 배반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혹시나 이를 원하지 않는 분들은 이쯤에서 글을 그만 읽으셔도 좋겠다.

포드의 레이싱팀의 담당자가 된 캐롤 셸비는 첫해 목표 달성에 실패한다. 하지만 재차 기회를 부여받았고 르망 제패를 위해 차근차근 순조롭게 단계를 밟아나가고 있었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켄 마일스의 레이싱 참가를 무산시키고자 하는 부사장이 레이싱팀의 총책임자로 임명되어, 헨리 포드 회장과 함께 그것을 못 박기 위해 현장에 방문하게 된 것이다. 켄 마일스는 최고의 실력을 가진 드라이버지만 충동적인 성격 탓에 회사의 이미지를 실추시킬 우려가 있다고 부사장은 판단하고 있다.

셸비는 르망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마일스가 꼭 필요하다고 회장을 설득하기 위한 계획을 세운다. 그를 스포츠카 조수석에 태워 이 레이싱이 얼마나 빠르고 격렬하고 위대한 것인가를 체감시키려는 계획이다. 팀원 전원의 합심 하에 회장에게 레이싱의 맛을 보여주는 데에 성공한 셸비는 뜻을 전하기 위해 차를 잠시 세운다.

이 대목에서 나는 회장이 “정말 짜릿하구먼!”하고 탄성을 지를 줄 알았다. 영화 속 그는 큰 소리를 내었는데 그건 환호가 아니라 엉엉 울음이었다. 피도 눈물도 없어 보였던 회장이 꺼이꺼이 목놓아 운 이유는 포드의 창설자이자 자신의 아버지가 떠올라서다. 아버지도 이 압도감을 느껴봤어야 했다는 아쉬움과 죄스러움이 좁디좁은 시트에 구겨 넣어진 그를 울게 한 것이다.

인간은 단순하지 않고 다 다르다. 그래서 재밌다. 찾아보니 이 장면에 대해 ‘Outstanding Scene’이라 평하는 뉴욕타임스의 기사가 있다. 인간은 단순하지 않고 다 다르지만, 누군가에게 좋은 건 대체로 다 좋아 보이나 보다. 그러니 이야기란 무릇 인간이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자아내는 것이어야 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든다. <포드 V 페라리>는 전적으로 그렇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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