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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Jan 10. 2020

#60. 작정 않고 일단 몸을 맡기기로

2020.01.08.

최성재란 이름을 처음 들은 건 작년 12월 7일이다. <영화식당> 녹음 중 ‘최근에 우리를 즐겁게 한 것들’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중, 페퍼가 “요즘 봉준호 감독의 통역사 샤론 최라는 분을 덕질하고 있다, 영어를 너무 잘하시더라.”라며 덕심을 털어놓았었다. 그의 고백을 듣고서도 따로 찾아보진 않았는데 며칠 전 우연찮게 봉 감독의 인터뷰를 보게 됐고, 나 역시 그녀의 팬이 되어버렸다.

조금 헷갈리기는 한다. 그녀의 실력이 탁월하다는 걸 내가 진짜로 느껴서 팬이 된 것인지, 아니면 온 세상이 칭찬 일색이니 시류에 편승하여 대단하다고 믿게 된 것인지. 통역의 수준을 논하기는커녕 영문학 한 편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으니, 절반쯤은 주입된 팬심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영어’는 차치하고, 그녀의 목소리와 말을 전달하는 태도가 참으로 근사하다는 사실.

그런 그녀를 보노라니 영어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단순히 잘하는 게 아니라, 그녀처럼 우아하고 아름답게 영어를 구사하고 싶다는 욕심이다. James는 늘 내게 “충분히 잘하고 있는데 왜”하며 용기를 주지만 그게 그의 따뜻함임을 안다. 어쨌거나 영어를 할 때면 스스로가 항상 불만족스럽고 답답하니, 의욕이 치솟아 공부를 시작했다가도 금세 접기 일쑤였다. 이상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임을 아주 연례 행사처럼 체감했달까.

이번에도 스쳐가는 바람이겠거니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몸을 맡기는 삶이 더 즐겁고, 즐겁게 사는 게 남는 거라는 신념이 있기에 그에 따르기로 했다. 3년 전쯤 하던 전화영어를 다시 할까 고민하다 James에게 조언을 구했더니 ‘reading의 속도 = listening 능력 = 말하기 기초’이니, 진심으로 영어를 잘하고 싶다면 고통스럽더라도 독해를 하라고 답했다. 그게 어려워 많은 이들이 리스닝이나 초보적인 회화로 건너 뛰게 되는데, 그러면 기초 공사도 부족할뿐더러 영어를 접하는 시간의 긴장감이 낮아져서 허상에 가까운 만족감만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내 경험을 곱씹어 봐도 백 번 옳은 말이다. 한창 일본어를 공부할 땐 무작정 읽고 쓰고 외웠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니 차츰 귀가 트였고 말도 하게 됐다. 그렇게 어느 정도 구력을 쌓아두니 한자를 까먹은 것 외에는 지금도 일본어를 구사하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다. 한자를 모르면 리딩이 안된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써놓고 보니 엄청난 궤변이구먼.

아무튼, 그때처럼 언어 공부에 전념하기는 불가능하니 그 순간만이라도 고통을 상쇄할 만큼 흥미로운 읽을거리를 찾기로 했다. 선택은 미국의 영화 매거진 ‘엠파이어’. 눈 질끈 감고 정기구독을 신청할까 하다가 미련해지지 않기로 결심, <아이리시맨> 특별 기획이 실린 10월호를 낱권으로 구매했다. 과연 나는 백 페이지 남짓한 이 잡지를 완독할 수 있을 것인가.

출발은 산뜻하다. 스콜세지, 드니로, 파치노, 페시 그리고 그들의 걸작에 대한 이야기가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기에 이것만으로도 본전은 뽑았다. 특히 인상에 남는 대목은 원작 소설을 접한 드니로가 스콜세지에게 달려가 “여기 영화가 있다. 이건 꼭 해야 한다.”라고 했다는 부분. 역시, 그들도 몸을 맡기는 사람들이었다. 내적 친밀감과 독해력이 1 상승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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