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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Jan 17. 2020

#62. 눈물이 주룩주룩, 그래도 해피엔딩

2020.01.12.

강아지를 키우는 것이 처음이었던 우리 가족은, 누나가 어디선가 주워들은 지식을 바탕으로 거실에 터를 마련해 마롱이가 홀로 잠을 자게 했다. 어릴 때부터 독립적으로 키워야 한다는 취지였던 듯싶다. 담요와 쿠션 등으로 포근한 환경을 조성해줬지만, 불이 꺼지고 나면 태어난   3개월이 되지 않은 마롱이는 낑낑대곤 했다. 못내 안쓰러웠던 나는 가족들 몰래 나와 한동안 녀석을 무릎에 앉히고 보듬어 주었다. 아직 오줌을 가리지 못했던 때라  잠옷 바지에  차례 실례를 하기도 했지만, 그게 대수랴. 곁에 있어줄 누군가를 애타게 찾던 조그마한 털뭉치의 쌔근거림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건 어쩌면 내가 다른 생명에게 진정으로 위안이 되고 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에만 감각할  있는 경이로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마롱이가 집에 완벽히 적응을 마치고 활개를 치기 시작할 무렵에는 늦잠을 자려야  수가 없었다. 새벽 6시만 되면 방문을 사정없이 박박 긁어대고,  소리를 들은 누군가가 길을 터주면 한창 곯아떨어져 있는  얼굴을 미친 듯이 핥아댔다. 그렇게 세수 아닌 세수를 당하고 나면 얼른 일어나 녀석과 한바탕 뛰어주는 것이 나의 주요한 임무였다. 물론 미션을 수행한 뒤에는 재차 몸을 뉘이고 게으름을 피웠지만, 어쨌거나 덕분에 하루의 시작은 전과 비교가 안되게 활기차고 빨라졌다. 언제나 아침 7시면 출근을 하는 아빠와 그런 그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엄마의 분주함을 실로 오랜만에 눈으로 확인하게  것도  즈음이다. 마롱이는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혔을 뿐만 아니라,   자리에 존재했지만 잊고 있었던 단면들을 다시금 만나게 해준 셈이다.

가끔 마롱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날을 상상할 때가 있다.   없이 건강하게 장수하고 열다섯에 세상을 떠난다고 가정하면, 그때 나와 누나는 사십  초중반의 완연한 중년일 것이고 부모님은 백발이 성성한 칠십 노인이 되어있을 것이다. 나와 누나는 차치하더라도 노쇠한 부모님들이 자식을 잃는 고통에 버금간다는  로스를 과연 감당하실  있을까 걱정이다. 살아생전 맞닥뜨리는 여러 슬픔들 중에서 가장 커다란 슬픔을 늘그막에 맞이하게 되는 것인데,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만약  시점에 내가 위로의 말로써 “사람이 죽으면 먼저  있던 반려동물이 저승의 문턱에서 마중을 나온다더라라는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준다면, 그것은 배은망덕한 일일까?

마롱이의 죽음에 대한 상념은 이따금 ‘마롱이는 나에게 얼마나  존재인가라는 자문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일면식이 전무한  명의 인간과 마롱이,   하나의 목숨만을 살릴  있는 상황에 처했다 치자. 누구를 구할 것인가? 나는 항상 답을 망설이게 된다. ‘나이는? 성별은? 살아온 과정은?’ 등등 당사자에 대해 자꾸만 이런저런 조건을 대입해보고 속으로 이른바 ‘생명의 무게 가늠해보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백이면  마롱이를 선택하겠지만,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마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손을 뻗게  것만 같다. 알량한 윤리의식의 발로일 게다.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스스로가  싫어지는 순간이다.

반려동물을 잃은 이들을 오열하게 만드는 흔적이 바로 집에서 발견되는 동물의 털이라는 말을 들은  있다. 장례를 치르고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눈물샘이 마르도록 눈물을 쏟고 이제 울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있는 힘껏 참고 참았을 텐데,    오라기가 뭐라고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는 것이다. 그건 아마도 한계치에 다다른 정도로   잔에 더해진   방울이었을 것이다. 반려동물과 함께한 시간의 아주 사소한 조각들까지 심장에 각인되어 있기에, 이토록 작은 무언가도 금세 해일처럼 커져 그들을 삼켜버린 것이었을 거라 짐작해본다. 아득하지만, 나도 결국엔 겪게  테지.

곰곰 생각해보면  정말 마롱이의 털이 무엇보다 그리울  같다. 눈처럼 새하얗고, 그래서 금방 더러워지고, 이틀만 빗질을 걸러도 엉망진창으로 곱슬거리는. 그러나 어떤 상태에서도 귀여움을 잃지 않고 새까만 눈동자와 , 연분홍색 혀를 더욱 부각시키는. 눈이나 비가  다음 날에 산책을 하면 구정물로 새까맣게 변해 버리는, 꽃이 피는 계절에는 꽃씨들을 지독하게도 빨아당기는, 무더운 여름날 홀라당 벗겼을  ‘이게  털빨이었음을 실토하게 만든 너의 흰옷이. 미용을 하고 오면 한나절은 시무룩,  처져있던 모습부터 쓰다듬고 끌어안고 씻기고 팔베개를 해줄 때마다 느껴지던 보들보들한 감촉까지  모든 것들이 사무치게도 간절하지 않을까.

얼마  ‘강아지 나이 계산기 마롱이의 나이를 확인해보니 녀석이 벌써 50대가 넘었다. 머지 않아 마롱이는 그렇게도 좋아하는 아버지의 나이를 앞질러 가버릴 것이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자기 편한 대로 설정한 숫자 놀음에 불과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물의 수명이 인간의 그것보다 짧은 것은 확실하고  마롱이가 생로병사의 계단을 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걸어갈 것은 분명하다. 씁쓸한 일이다.

최근 몇몇 지인들이 자신의 반려동물을 떠나 보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감히 그들의 비애를 유추할  없다. 교류가 거의 없는 사이인지라 별다른 안부도 전하지 못했지만,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모종의 동지의식을 갖고 있다. 모두 반려인들이기에. 그리고  멋대로 믿고 있다. 무척이나 슬프겠지만 여태까지 반려동물과 그들이 같이 그려온 영화가  아름다운 과정만으로도 새드엔딩은 아님을. 나도 그들처럼  훗날, 한아름의 추억을 안고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는 해피엔딩을 맞이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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