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3.
지난 토요일에는 오랜만에 블블이 ‘영화식당’을 방문했다. 직업적으로 글을 쓰고 또 다른 동료들과 매주 팟캐스트를 만드느라 바쁠 텐데 흔쾌히 와주어서 진심으로 고마웠다. 역시는 역시, 그간 쌓은 구력이 있어서인지 마치 어제 마이크를 사이에 두고 떠들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녹음을 마쳤다.
<겨울왕국2>에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블블이 이런 말을 했다. “이번에 첫 편과 후속작을 몰아서 다시 보니, 둘 사이에 개연성이 보여서 좋았다. 애초에 이걸 의도했다면 진짜 대단하다.” 나는 “디즈니 정도면 다 계획이 있지 않았겠나.” 답하면서 오래전 읽었던 만화책을 떠올렸다. 두 고등학생이 만화가가 되기 위해 도전하고 또 만화가로써 성장하는 이야기를 담은 만화 <바쿠만>이다.
<바쿠만>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이것이다. 연재 중인 만화의 스토리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벽에 막혔을 때,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은 그들의 작품을 처음부터 천천히 다시 읽어 나간다. 그러면서 당시에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바로 지금 복선으로 작용할 수 있는 요소를 찾는다. 그렇게 발견한 단서들을 현재로 소환해 이야기의 동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다른 누구의 손을 빌리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역사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 참 근사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 뒤늦게 유산슬에 빠져 <뽕포유> 에피소드들을 몰아보면서 <바쿠만>에서 느꼈던 벅참을 재차 맛봤다. <무한도전>을 통해 유재석이 보여왔던 트로트에 대한 애정, 여러 가요제를 성공시켰던 김태호 PD의 내공이 탄생시킨 오래된 신세계. 웃음도 웃음이지만 박토벤, 정차르트부터 심성락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자신의 자리를 지킨 대가들에게 대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었다는 점, 조금 과장인 듯도 싶지만, 트로트라는 장르를 모두가 즐기도록 함으로써 걷잡을 수없이 커져만 가던 세대 간의 골을 얼마간 메웠다는 측면에서도 훌륭한 기획이었다.
분명 세상엔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단 한 순간이 인생을 망가뜨리거나 출구 없는 험로로 몰아놓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꾸준히 무언가를 한다는 건 귀한 일이라고 믿는다. <바쿠만>의 두 만화가도, <뽕포유>의 수많은 예술가들도 다들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스티브 잡스는 “Connecting the Dots”를 말한다. 그간 흩뿌려온 점들을 이으라는 것. 내가 무심코 그러나 묵묵히 새겨온 발자국들이 결국에는 현재를 돕고 또 미래에 영향을 주리라는 사실을 믿으라는 것. 이렇게 하나의 형상으로 연결된 점들이 별자리가 되어 반짝거리는 모습을 계속해서 만나고 싶다. 내게서도 타인에게서도, 우리에게서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