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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Oct 15. 2020

#81. 빚지고도 할 경험

2020.10.15.

오후 두 시쯤, 한 장의 사진을 받았다. 그곳엔 세 사람이 있었다. 단가라 티셔츠를 맞춰 입은 어느 60대 부부와 오늘 하루 그들을 카메라에 담아 준 한 남자였다. 전에 없이 활짝 웃고 있는 부부의 얼굴에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잘 즐기고 계시는군, 마롱이가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멋들어진 수염의 주인공은 자전거 여행자 송학 형이다. 제임스 형이 태국에서 만나 친분을 쌓은 그를 나도 올해 알게 되었다. 나는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머나먼 대륙에서 페달을 밟으며 우리의 방송을 들었다던 그는, 제주도를 여행하는 내 부모님을 찍어달라는 부탁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촬영 사전에 사전 미팅도 먼저 제안할 정도로 열의를 보여주어 더없이 고마울 따름이다.

사진 속 표정을 보아하니 두 사람도 송학 형과의 시간이 퍽 만족스러웠구나 싶어 안심이다. 사진작가가 이토록 정성스레 자신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게 처음일 텐데, 형이 고생 깨나 했겠구나 하는 짐작도 든다. 부러 맞추어 드린 커플룩, 아니 시밀러룩이 빛을 발했기를 바라며, 결과물을 기다려봐야지.

새로운 경험을 선물하고픈 마음이 생기는 건 내가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니면 부모의 나이 듦이 갈수록 선명하게 느껴져서일까. 이런 의문에는 대체로 둘 다겠지, 하고 자문자답하게 된다. 내가 부모에게 갖는 부채감의 코어가 어쩌면 ‘경험’이 아닐까는 생각도 든다.

나에게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절대적인 가치의 차원이 아니라 상대적인 거리감의 차원에서, 일이 그들에겐 쉽사리 용기를 내거나 나아가 상상조차 어려운 일인 경우를 목격할 때 내가 무언가 단단히 빚지고 있음을 체감한다. 빚지고 속 편한 이 어디 있으랴, 그런 연유로 때때로 무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한동안은 긴축재정이다.

최근 다시 펼쳐 든 책에서 미드 <하우스>의 한 에피소드를 접했다. 사전에 제거할 수 있는 역경을 자식에게 물려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하우스와 다른 캐릭터가 충돌하는 장면이다. 신체적인 장애가 이슈였으나 나는 그곳에 가난을 대입해 읽었다. 가난이라는 역경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여러 목구멍을 온몸에 주렁주렁 메단 채 턱걸이를 이어 온 누군가가 떠올랐던 까닭이다.

많이도 무거웠을 것이다. 지금이라고 그리 다를까. 상황은 나아졌어도 책임감이랄지 사명감이랄지, 진이 빠져도 끝끝내 철봉을 놓지 못하게 했던 심중의 빛은 여전하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그건 빛이었을까 아님 빚이었을까, 어쩌면 빚으로 된 빛이었을지도?

모르겠고, 앞으로도 가끔씩은 이번처럼 무리를 해야겠다. 빚지고도 할 경험도 있다지 않나. 빚은 내가 지고 경험은 그들이 누리고. 거꾸로 역할극도 이따금은 기꺼우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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