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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Nov 02. 2020

#84. 운명의 그날까지

2020.11.02.

친구가 결혼했다. 어쩌면 내 가장 오래된 친구다.

듣자 하니, 중학교 땐 이름깨나 날렸던 주먹이었단다. 추억의 사이트 ‘다모임’에서 이른바 ‘부산통’으로도 종종 거론되었단다. 21세기에 야인시대를 살아오기라도 했는지 그를 주인공으로 한 무용담은 좀, 맥이 빠질 만큼 터무니가 없다. 아무튼 그런 야만의 나날에 질려 이제는 평범하게, 가능한 모범적으로 살리라 결심하고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을 했단다. 그렇게 그와 나는 동천고등학교 같은 학년 같은 반이 되었다.

동천고등학교는 내가 살던 해운대와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다. 해운대에 있는 학교로, 특히 남녀공학으로 진학하면 내가 공부를 등한시할 것이라는 중 3 담임 선생님의 단호한 전언에 부모님은 주소를 이전하는 강수를 두셨고, 나는 졸지에 생전 처음 들어보는 산골짜기 남고에서 아까운 십대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 지역에서 누가 싸움을 잘하고 누가 잘나가고 이런 걸 알 턱이 있나.

그에게 나는 특별한 존재다. “나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니가 처음이야!”와 비슷한 존재다. 창가 맨 뒷자리에 앉아 험상궂은 표정으로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산만한 덩치의 대장. 그 클리셰를 와장창 깨부순 게 나다. 내가 먼저 그에게 농담을 건넸던가 놀렸던가 욕을 했던가, 솔직히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무튼 격의 없이 그에게 다가갔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의 입장에서 다른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을 무서워하는데 웬 쪼그만 놈이 와서 툭툭 건드니까 그게 썩 반가웠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머지않아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듣게 되었고 조금 쫄았지만, 딱히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 소싯적의 풍문과는 별개로 내가 겪은 그는 착하고 순진하고 섬세하고 또 매우 수다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간이 갈수록 그의 주변엔 그를 편하게 느끼는 친구들이 많아졌고, 어른이 된 뒤에도 여전히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돌아보면 우리는 숱한 ‘처음’을 주고받았다. 그는 내게 처음으로 술을 사 준 친구다. 고 1 중간고사 즈음이었나, 자주 가는 곳이 있다며 나와 또 다른 친구 하나를 경성대학교 정문 맞은편 골목에 자리한 술집으로 데려갔다. 탕수육과 김치찌개와 소주의 조합이었고 그곳의 이름은 ‘음식남녀’였다. 이안 감독의 영화에서 모티브로 한 작명인가 잠시 궁금해하며 찌개를 한 술 뜨던 차에 “여기 오면 전부 다 찌개 안에 고기 먼저 먹으려고 싸운다”라며 웃던 그의 얼굴이 선명하다.

2012년엔 생에 첫 도보여행을 함께 했다. 바닷길을 따라 대한민국 최북단에서 최남단으로 걸어보자는 거창한 포부를 굳이 한여름에 먹은 덕에  고생 좀 했다. 물론 우리의 걸음은 정동진에서 멈췄지만. 둘이 일본에 갔던 게 그전이었는지 후였는지는 가물가물하다. 배를 타고 후쿠오카로 입항해 후쿠시마, 오사카, 교토, 고베를 거쳐 다시 후쿠오카로 돌아 나오는 제법 긴 일정이었다. 생김새와 달리 그가 엄청나게 오래 씼는다는 사실만 명확하고 나머지는 흐릿하다. 좁아터진 일본 욕조에 그 거구를 구겨넣은 장관.

이외에도 여럿이다. 학창시절 친구 중 유일하게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녀석이니, 앞으로도 분명 더 많은 처음들이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혼인미사를 지켜보는 경험도 그 덕분에 처음으로 해보았다. 한때는 나도 성당에서의 결혼을 꿈꾸었지, 회상하며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주례를 맡으신 신부님의 “두 사람은 왜 결혼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운명이라서 결혼합니다.”라고 답할 때 나는 제일 크게 미소를 지었다. 참으로 내 친구 다운 답이어서다. 낭만적인 자식.

너의 결혼식에 참석하는 건 처음 한 번으로 족하니, 운명하는 순간까지 행복하게 잘 살아라. 그게 너의 운명일 거다.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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