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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Nov 08. 2020

#85. 적당한 사이

2020.11.08.

지옥이 있다면 그곳이 미용실이 아닐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낯선 이와 꼼짝없이 마주 앉아 있어야만 하는 삼십 분 남짓한 동안이 영겁처럼 느껴졌던 나날들. 이십 대 중반 즈음였지, 당시엔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다가 도저히 보아 주기 힘든 몰골이 되었을 때 두 눈 질끈 감고 발을 내딛다가도 금세 도망치곤 했드랬다. 그랬던 내가 근 몇 년 간은 길어도 사 주에 한 번은 꼭 커트를 하고 분기마다 염색을 한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다.

이젠 샵을 방문하는 일이 퍽 즐겁다. 머리를 하면 산뜻하고 상쾌한 기분이 들어서 좋고, 샵을 방문하는 것 자체도 제법 리프레시가 된다. 이번 토요일에도 커트를 하고 염색을 했다. 역시나 좋은 시간이었다. 그간 성격을 비롯한 내 많은 것들이 변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햇수로 7년째 내 헤어를 책임지는 디자이너와 합이 잘 맞기 때문일 테다.

그와의 첫 만남은 스물일곱의 봄 무렵으로 기억한다.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와 다툼이 있었고 그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다. 그러나 끝끝내 나는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고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됐다. 어영부영하다 도서관이나 가자 하며 학교로 발길을 돌리는데 유리창에 비친 스스로가 너무 못나 보였다. 홧김에 제일 가까이 있던 미용실에 들어갔다.

패기 있게 문을 열었지만 이내 쭈뼛쭈뼛, 대충 잘라 달라 내뱉은 뒤 공상에 잠긴 척 딴청을 피웠다. 이리저리 한참 살펴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커트도 커트지만, 여기는 자신을 사랑하려고 오는 게 아니겠냐고. 어울리는 스타일을 고민해 볼 테니 한 번 확 바꿔보자고. 지금도 좋지만 깔끔하게 꾸미고 다니면 훨씬 더 멋질 거라고. 그날 이후 그는 내 전담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렇게 덜컥 인연을 맺어 버린 건 권유에 따라 도전한 스타일이 마음에 든 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단 그가 그때 내게 가장 필요했던 말을 해준 덕이다. 당신은 지금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 더 멋있어질 여지가 충분한 사람이라는 것.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너무 의미 부여를 하고 있나, 싶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고마움은 진짜다. 별 뜻 없이 건넨 말일지라도, 의례히 하던 말이었을 지라도, 어쨌거나 그건 그 순간의 내겐 커다란 의미였다.

그는 모를 테지, 한 번도 이런 얘기를 꺼낸 적은 없으니까. 다만 우리는 그저 몇 주를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따름이다. 주기적으로 마주한 지난 칠 년 간 나는 사회인이 되었고 그는 유부가 되고 또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다. 굵직 굵직한 사건들을 공유해왔지만 거리는 여전하다. 가깝지도 멀지도, 편안한 침묵을 공유할 만큼 깊지도 그렇다고 피상적으로만 서로를 대할만치 얕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사이.

그래서 좋다. 언제나 같은 간격으로 적확하게 그어진 선 위에 서서 최선의 악수를 하는 느낌이랄까. 적당주의를 타파하자는 둥의 격언으로 꽤나 폄하당하는 단어이지만, 적당이 얼마나 쾌적한 것인지 늘 깨닫고 있다. 머리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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