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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Oct 29. 2020

#83. O Captain! My Captain!

2020.10.29.

지지난 주말 ‘영화식당’ 녹음 중에 이런 말을 했다. 특정 작품의 작위적인 설정에 대해 얘기하며 누군가 “이건 너무 영화잖아!”라고 외친 뒤의 일이다.

우리 모두 영화를 보고 영화 속 인물을 동경하고 영화 같은 인생을 갈망하면서 정작 왜 그렇게 살지는 않을까. 민망해서? 두려워서?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서? 내가 강동원이 아닌 바에야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내 삶이 저절로 영화가 될 리는 만무하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용기를 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든다, 고. 그렇게 말했다.

고만고만한 세상을 향해 선전포고하듯 내뱉고서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이었다, 그동안은. 오늘은 달랐다. 고대하던 만남을 위해 무릅썼고 더할 나위 없이 영화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약 이십여 년 만에 옛 은사님께 연락을 드렸고, 내 안에 박제되어 있던 그가 여전히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음을 확인했고, 어렴풋하게나마 그도 여전히 나를 기억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방송에서도 사석에서도 자주 언급했던 분이다. 지독스레 내가 나 자신을 경멸하던 시절, 나도 어쩌면 남들처럼 괜찮은 인간인지도 모르겠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셨던 분이다. 늘 뵙고 싶었는데 마음을 못 먹다가 최근 우연히 부산시 교육청 스승찾기 사이트를 발견하고 현재 재직 중이신 학교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그러도고 일주일은 캡처한 화면만 흘끔거리다 말았다.

점심시간에 정원에서 음악을 들으며 턱걸이를 하다 불현듯 결심이 섰다. 전화를 걸어야겠다. 사무실로 돌아와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고 빈 회의실에 앉았다. 후, 관심 있는 여성에게 전화를 걸 때도 이렇게는 안 떨렸는데 왜 이러지. 가슴을 부여잡고 051로 시작하는 번호를 눌렀다. 곧 학교 행정실 직원분이 전화를 받았다. 사정을 설명하니 그는 교무실로 전화를 돌려주었고 다른 선생님 한 분을 거친 끝에 은사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목소리가 그대로 셨다. 저는 누구다, 스승찾기 사이트를 통해서 연락드렸다, 저를 기억하시냐. 선생님은 나를 체구가 작고 피부가 까맣고 약간 쓸쓸한 인상의 아이라고 떠올리셨다. “사투리를 하나도 안 쓰는 걸 보니 서울 사람 다 됐네”, “목소리가 참 좋네”, “얘기를 좀 하니까 네 얼굴이 기억나려고 한다”셨다. 대화는 약 이십분가량 이어졌고, 나는 아직도 행복하다.

진작에 연락드릴 걸, 어려운 거 하나도 없는데. 가벼운 후회도 되지만 어쨌든 진작(振作)했으니 되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부산에 내려가 찾아뵙고 싶다. 그때를 위해 나는 또 진작할 것이다. 이런 다짐을 할 정도로, 행복하다.

선생님은 어떠셨을까. 부디 다만 몇 시간이라도 즐거우셨기를. 바라건대 내 또래의 아들들에게 이런 일이 있었노라 자랑하셨기를, 저녁 식탁에서 남편에게 밝은 미소로 나와의 대화를 상기하셨기를. 당신이 누군가에겐 얼마나 큰 존재인지 기껍게 체감하셨기를. 그도 나처럼 오늘이 영화 같은 하루였기를.

일과를 마무리하며 텀블러와 커피 기프티콘을 보내드렸다. 장문의 감사 인사도 덧붙였다. 내가 선물한 텀블러에 좋아하시는 커피를 듬뿍 담아 드시면서 이따금, 저 먼 발치에 선생님 덕에 나쁘지 않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는 제자가 있음을 떠올려 주신다면 무척 기쁠 것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프라하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신 선생님의 모습 아래 메시지가 공교롭다. ‘Carpe Diem!’ 이라니. 진작에 영화처럼 살고 계셨군요, 웃음이 난다. 이참에 속으로나마 외쳐봐야지.

O Captain! My Cap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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