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eungJae Shin Nov 23. 2020

#87. 잃어갈 게 아니라

2020.11.23.

드디어 신규 제안 프로젝트를 일단락 지었다. 꼬박 이주 동안 밤늦도록 고생을 했지만 호흡이 잘 맞고 마음으로 아끼는 동료들과 함께여서 그리 힘든 줄은 몰랐다. 결과를 기다려봐야겠지만 우리의 최종.PDF가 깨나 만족스럽기도 하고, 또 하나의 좋은 추억을 쌓았기에 어떤 결과라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뭐, 언제는 덤덤하지 않은 적이 있었는가마는.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지난주 작사 수업을 가지 못한 것이다. 이주 전에도 뒤늦게 도착해 한 시간밖에 배우지 못했는데, 셋째 날은 아예 결석이라니. 그래도 내일은 연차이고, 늦었지만 둘째 날에 받은 과제도 제출해서 안심이다. 수강생 여러분 앞에서 직접 쓴 가사로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점이 걱정이지만, 다 하는 거니까.

과제는 선생님이 준 짧은 멜로디 두 개에 각각 가사를 붙이는 것이다. ‘응원가’라는 이름의 신나는 버전과 ‘따뜻송’이란 이름의 따뜻한 버전이다. 이미 메인 소재를 정했기에 마지막 완성곡, 데뷔곡이라고 수업에서는 표현하는, 을 위한 연습도 할 겸 숙제의 주제도 팔찌로 정했다.

멜로디를 반복해서 들으며 흥얼흥얼하다 보니 재미가 돋아서 응원가 가사는 숙제를 받은 당일에 거의 다 썼다. 자기 걸 내놓으라 성화인 조카에게 소심하게 딜을 하는 삼촌의 모습을 담으면서 혼자 킥킥댔다.

응원가 제목: 네고
내놔내놔 내꺼내놔 나 그거 다 내가다 만든거야
어서빨리 어서빨리 안 주면 콱 깨물어 버릴거야
잠깐만 기다려봐 나 주면 너 요 술봉 사다줄게
시크릿 쥬쥬맞지 쿠 팡에 로 켓 배송 시켜놓을게

반면 따뜻송은 회사일에 쫓기다 보니 조금 전에야 부랴부랴 마침표를 찍었다. 따뜻송 가사를 쓰면서,  미리 쓰지 못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팔찌에 대한 지난 일기에서 조카가 나와의 일을 금세 다 잃어버릴 것이라고, 그게 참 쓰리다고 털어놓았었는데, 그새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라는 희망이 내 안에 피어났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은 아버지의 생신이었다. 조카와 같이 케이크를 사러 가기로 약속했기에 조카가 피아노 학원에서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지하철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곧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온 조카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맞잡을 듯하다 말고 조카는 내 손목을 살피곤, “어? 팔찌 안 했네?”하고 물었다.

옷에 덮여있었을 뿐이라고 얼른 소매를 걷어 보여주니 배시시 웃는 얼굴이라니. 그래, 잃은 게 아니라 잠시 잊은 거였지. 잃어갈 것이 아니라 잊어갈 뿐이겠지. 그 속도는 내 예상보단 훨씬 더 느릴 지도, 모를 일이지. 먼 훗날에도 문득문득 떠올려주겠지. 나와의 시간들을. 따뜻한 밤.

따뜻송 제목: 여기있어
다 잊은줄 알 았는데 너 아니었네
내 손목을 살 피며 오늘은 왜 안했녜
너의 핀 잔에 뭉클했어
여깄어

매거진의 이전글 #86. 물음표로 된 팔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