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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Dec 18. 2020

#90. 그녀는 그녀대로, 나는 나대로

2020.12.18.

옛날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다섯 살 때의 일이다.

당시 엄마의 아버지는 노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한 치 앞이 막막한 가난 속에서도 어떻게든 돈을 땡겨 밤마다 화투장을 쥐었다. 어느 날은 제법 큰 건수를 올렸는지 달밤에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나마도 문풍지가 너덜너덜해진 단칸방의 조그마한 문이었지만 위풍당당하게 온 가족을 깨웠다. 그러곤 두둑한 돈 다발을 바닥에 던지며 에헴, 헛기침을 했다. 돈을 집어 든 할머니는 잠시 골똘하더니, 좁은 방을 밝히고 있던 촛불에 지폐를 한 장 한 장 태웠다. 그날 이후로 할아버지는 노름을 끊었다나 뭐라나.

실화라곤 믿기 어려울 만치 흥미로웠지만, 다 듣고 나서는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엄마는 이 이야기를 왜 늦은 밤 홀로 밥을 먹는 나에게 했을까. 왜 연말이라고 큰마음 먹고 나름 큰 액수의 용돈을 건넨 바로 직후에 했을까. “아들한테 이렇게 용돈 받으니까 기분이 이상하네”라는 멘트는 왜 쳤을까. 대체 왜!

석연찮았던 모양이다. 한 번도 얼마 버는지 공개한 적 없고 늘 비슷한 옷만 입고 다니면서 소위 궁상떨며 사는 마냥 보이는 자식이, 무슨 날도 아닌데 봉투를 쥐어 주니 그럴 법도 하다. “정직하게 번 돈이니 염려 놓으시고, 자기 자신을 위해 쓰십시오”하며 부러 안심시키지는 않았다. 기우의 대가를 치르시라.

거실로 향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옛 일화를 하나 떠올렸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여름방학 직전에 학교에서 단체로 IQ 테스트를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결과는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이들 사이에도 빠꼼이는 있게 마련, 동네 토박이였던 여자아이가 “김홍수 IQ138 나와서 선생님들이 놀랐다더라”라며 풍문을 전했다. 김홍수는 전교에서 가장 공부를 잘했던 같은 반 남자아이다. 새하얀 피부에 외모와 성격마저 서글서글해 이름에 걸맞게 범람하는 인기를 누렸다. 꽤 친한 친구였고, 질투의 대상이었다.

그날 저녁 엄마가 테스트 잘 받았냐 묻기에 “어, 138 나왔다”라고 답했다. 정말 한 치의 거짓 없이 무심결에 저 말이 툭, 튀어나왔다. 한 치의 거짓 없는 거짓말이라니 모순이지만, 아무튼 그랬다. 이전까지도 그 후로도 오래도록 공부하라 잔소리 일절 한 적 없고, 외려 공부는 못해도 되니 먼저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을 전해왔던 그녀도 그 순간엔 잠깐 눈빛이 반짝였던 것 같다. 지인들에게 자랑도 깨나 하고 다닌 것으로 알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엄마가 아들의 비상함에 처음으로 득의양양할 무렵엔 감성지수(EQ)라는 것도 유행했다. 지능지수(IQ)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백과사전에 따르면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조절, 원만한 인간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마음의 지능지수'를 뜻한다. TV 광고에서도 “이제는 EQ를 키워줄 때”라는 둥의 캐치프레이즈가 자주 흘러나왔었는데, 엄마는 늘 “승재는 나를 따라 공연을 많이 보러 다녀서 EQ는 아주 높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돌아보니 아들이 IQ도 높고 EQ도 높은 완성형의 인간이기를 바라는, 혹은 실제로 그러리라 믿는 팔불출적 부모감성이 아니었나 싶다.

만약 아직도 엄마가 내 IQ가 138이라고 믿고 있다면,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낸다면 이제라도 정정해 주어야 할까?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이럴 가능성도 있다. 내 IQ가 진짜로 138이었다면? 그보다 더 높았다면?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당장 테스트를 다시 받아 봐야 그때와 지금은 다를 테니 공정한 비교는 불가하다. 그러니 그냥 서로 좋을 대로 믿기로 하자. 엄마는 엄마대로 아들이 똑똑하다 여기고, 나는 나대로 똑똑하게 살고.

오늘 아침 출근하는 내게 엄마는 “아들이 준 돈으로 스피커 하나 사야겠다. 오랜만에 음악 들으면서 책 읽고 운동하고 해야지”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덧붙였다. 덕분에 나서는 길이 포근했다. 별 대꾸 없이 피식 웃고 말았지만.

P.S: 사진은 임송학 형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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