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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Dec 16. 2020

#89. 그림자가 섭하지 않도록

2020.12.16.

그림자가 섭하지 않도록

오랜만에 프로필 사진을 바꿨다. 2019년 생일 즈음 시시알콜 친구들이 사준 고양이 소주잔을 들고 있는 모습을 여태 써왔으니, 근 1년 하고도 8개월 만이다. 새로운 프사는 제임스 형이 찍어줬다. 얼마 전 함께 점심을 먹고 내가 늘 가는 정원에서 턱걸이를 하는 내 그림자가 담겨있는데, 이걸 프사로 써도 되겠냐 물어보니 “쓰라고 찍어준 건데 괜찮지”라고 흔쾌히 답을 주었다.

필요와 발명의 순서에 대해 생각한다. 대개는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무언가 발명된다고 여기기 쉬운데, 내 의견은 조금 다르다. 오히려 발명이 필요를 앞선다고 믿는 편. 만들어 놨더니 그걸 가지고 이것저것 하게 되는 일이 더 일반적이지 않을까? 공이랄지, 필름이랄지, 축음기도 그렇고.

프사도 바꿔놓고 보니 이렇게 저렇게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사진의 구도와 그림자의 모양이 마음에 들었던 것뿐인데, 어쩐지 이게 나를 참 잘 표현하는 듯해 흡족하다. 언제였더라, 아무튼 수년 전에 나에 대해 한 친구가 백조 같다 평한 적이 있다. 수면 아래에서 분주하게 헤엄을 치지만 겉으로는 티를 전혀 안내는 사람이라고. 속으로 뜨끔하며 맞는 말이네, 감탄했었는데 철봉에 오른 그림자가 바로 그 수면 아래를 보여주는 느낌이랄까.

그림자는 말이 없고 다만 움직일 따름이니, 그림자가 진실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난 여전히 스스로를 꽤나 게으르고 의지박약의 귀차니스트라고 여기지만, 그건 어쩌면 오래된 습관 혹은 낡은 방어기제일지도 모른다. 노력했는데 성과를 못 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 최선의 문턱에서 늘 발을 빼지만, 어쨌거나 나름 애쓰고 있으니 말이다.

지난 달이었나, 친구들과 대화 중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스포츠 선수나 예술가의 덕목 중에서 우아함을 가장 높게 친다. 왜냐하면 그게 제일 유니크하니까. 무엇보다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도 잘하는 게 최고로 멋져 보여서다.” 이런 취향은 아주 어릴 적부터 형성되었으니, 열심인 모양을 남에게 내비치고 싶지 않은 내 성향도 자연스럽다.

이참에 이걸 깨보는 건 어떨까. 지금처럼 묵묵히 턱걸이를 하고 돈을 벌고 사람들을 만나고 녹음하고 글을 쓰고 꾸준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부러 스스로를 낮추거나 가혹하게 몰아세우지 않기. 용쓰다 실패하더라도 군말 없이 일단 해보고 또 해보기.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림자만큼만 살아보기. 어제오늘 같은 엄동설한에도 맨손으로 하루 세 차례씩 철봉을 잡았던 이 몸 아닌가!

작년 늦봄 처음으로 턱걸이를 했을 땐 제대로 된 자세로는 하나도 못했다. 이제는 정자세로 10개 전후는 그리 어렵지 않다. 내가 철봉을 오르락내리락 한 딱 그만큼 그림자도 그랬을 게 분명하다. 도약도 추락도 언제나 함께 해왔다. 딱 그만큼, 나는 나아졌다. 그러니 내 노력을 부정하지 말아야지. 그림자가 섭섭할 테니까.

그림자를 뜻하는 한자 영(影)을 찾아보니 터럭 삼()을 부수로 볕 경(景) 옆에 붙여두었다. 볕에 난 털이라는 건가. 마침 내 별명도 털보인데, 이건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그림자처럼 묵묵히 알아나가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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