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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ungJae Shin Dec 27. 2020

#91. 갇혀있고 열려있는

2020.12.27.

나에겐 이야기가 필요해. 재미난 이야기를 가져오면, 그때마다 맥주 한 병을 줄게. 태국을 여행할 때의 일이다. 꼬창이라는 섬으로 가기 전, 뜨랏이라는 지역에 잠시 머물렀다. 장군감의 풍채와 서글서글한 인상, 유쾌한 언변과 거침없는 박력을 갖춘 50대 여성 사장님이 운영하는 숙소였다. 주인장의 수완 덕분인지 그곳 로비엔 항상 손님들로 넘쳐났다. 나와 같은 젊은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백인 할아버지들이었다. 은퇴 후 남국으로 넘어와 연금을 받으며 유유자적하는 참으로 부러운 이들이었다. 숙소에 도착한 첫날도 이튿날도 자정이 지나도록 인파는 가시지 않았다. 사장님은 위트 넘치는 면박과 온화한 미소를 절묘하게 조합한 치고 빠지기로 좌중을 이끌었다. 수십 년 간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며 단련한 내공이란 과연 저런 것인가,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그녀가 내게 반짝임으로 기억되지 않음은 어쩐지 서글프다. 괜히 미안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녀를 생각하면 밤의 정열 보다 한낮의 권태가 더 먼저, 더 선명하게 떠오른다. 왁자한 밤이 지나고 해가 중천으로 자리 잡을 무렵, 텅 빈 로비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사장님은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오래된 친구 사이인 듯한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연스레 둘은 마주 앉았고 담소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몇 마디를 나누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영영 꺼지지 않을 폭죽 같았던 그녀가 하얗게 불타버린 표정으로 저렇게 말을 하더라. 이야기가 필요해. 무엇이든 줄 수 있으니, 새로운 이야기를 좀 가져다줘. 이어지는 한숨과 떨궈지는 두 사람의 고개까지. 어쩌면 내가 목격한 가장 슬프고 가장 두려운 장면이 아니었을까. 이야기는 힘이 세고, 세상을 구성하는 것은 이야기이고, 나도 결국엔 하나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저 모습이 너무너무 무섭다. 권태로워질까 봐, 권태감에 붙잡힐까 봐, 정말 무섭다. 돌아보면 어느 시점부터의 내 삶은 권태로부터의 도망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고백하자면 최근 발목을 잡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체불명의 함정에 빠져 이야기를 진행시키지 못하고 한 페이지에 묶여 있는 듯한, 진공의 상태에 있는 듯한 그런 느낌들. 크리스마스 연휴에도 축복 대신 이 불쾌한 묵직함이 내 앞으로 배달되었다. 글도 쓰기 싫고 영화는 지루하고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아 일단 씻자, 하며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제서야 화장대 위 카메라가 보였다. 그걸 손에 쥐고 부득불의 심정으로 북촌으로 향했다. 기왕 카메라도 샀겠다, 사진이나 찍자! 이런 마인드셋. 안국역에 내려 익숙한 삼청동 거리에 발을 내디디며 첫 셔터를 누르는데, 신기했다. 뭐랄까, 해갈의 쾌감이랄까. 추위도 잊고 홀린 듯이 두 시간 넘게 이곳저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갇힌듯한 답답함을 프레임에 무언가를 가두면서 해소한다는 게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지만. 재미있는 역설이다, 곱씹는데 갇힌다는 게 닫힌다는 건 아니지 않은가는 생각이 따라왔다. 내가 사진에 흥미를 가진 이유는 그것이 이야기가 될 무한의 가능성을 담고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면 이건 단순한 박제가 아닌데, 필름에 갇힌 채 닫혀 끝나버린 건 더더욱 아닐 텐데. 그게 맞다면- 십 년 전의 사장님과 친구도, 요즈음의 나도 사진 속 오브제처럼 잠시 머물러 있는 것뿐이겠지. 이 순간도 결국엔 이야기가 되겠지. 우리 모두 어딘가 갇혀있고 어디로든 열려있는 존재이니까. 사진이 재밌다는 말을 길게도 쓰는 나도 예외 없이 그러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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