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31.
순조로운 하루였다. 잠을 충분히 잤고, 늦지 않게 출근해 제법 쌓였던 일들을 마무리했다. 애정하는 동료들과 점심을 먹었고 샴페인을 한 병 샀다. 퇴근 후엔 위트 앤 시니컬에 들렀다. 비록 반가운 얼굴은 부재중이었지만 공간의 온기는 여전했고, 나와 남을 위한 책을 여러 권 사고 집으로 돌아왔다. 늘 그래왔듯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마롱이가 달려와 맞아주었다.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방에 들어가 겉옷을 벗어 옷장에 넣으려다 거울을 봤다. 어딘지 낯설었다. 하루 종일 티셔츠를 거꾸로 입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보다 목 앞으로 티셔츠가 더 올라왔던가?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던가? 곰곰 돌아보아도 딱히 모르겠다. 그냥, 정말로 순조로운 하루였다.
별일도 다 있군, 옷을 갈아입고 식탁에 앉았다. 셋이서 기념사진을 찍고 건배를 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한창 옛이야기를 듣는데 누나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왔다. 조카들이었다. 둘째가 재잘대는 목소릴 듣곤 첫째가 달려와 화면에 등장했다.
“할아버지, 나 좀 전에 엄청 이상했어” “왜 이상했어?” “씻고 잠옷을 입었는데 안에 티셔츠를 반대로 입어서 엄청 이상했어”
참 신기하지. 이제 서른다섯이 되는 나와 일곱이 되는 조카가 같은 날 같은 실수를 하다니. 살기는 내가 다섯 배나 오래 살았는데, 나이를 허투루도 먹었다.
괜찮아, 삼촌도 오늘 그랬어. 그래도 아무 문제 없이 잘 보냈어. 그러니까 괜찮아,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미 할아버지 할머니가 수차례 괜찮다고 잘했다고 우쭈쭈해주었으므로. 난 그저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따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마롱이와 산책을 나갔다. 공기가 차가웠고 달이 밝았다. 익숙한 동네를 한 바퀴 돌며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삶의 수많은 일들을 무감각하게 여기는 사람은 순식간에 노인이 될 것이다. 기뻐하고, 슬퍼하라. 울고 웃으라. 행복해하고 괴로워하라.’
이맘때면 습관처럼 들춰보는 김연수의 산문집 『지지 않는다는 말』에 나오는 문장이다. 2020년의 나는 어땠지?
마음껏 사랑하고 아파했다. 기뻐하고 슬퍼하며 웃고 울었다. 이따금 괴로웠고 자주 행복했다. 매년 그랬겠지만, 숱한 일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가 떠나가는 날 이렇게 느긋하게 지난 365일을 반추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복된 나날이었다. 티셔츠는 거꾸로 입었을지언정, 거꾸로 살지는 않았다. 순간순간을 감각하려 애쓰며 잘 살아왔고 다음 해에도 그리할 것이다. 가끔은 또 티셔츠를 거꾸로 입고 길을 나설 테지만 말이다.
같은 책에서 제일 좋아하는 문장은 이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가장 좋은 것을 좋아하자. 하지만 곧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나올 텐데. 그때는 그 더 좋은 것을 좋아하자. 그게 최고의 인생을 사는 법이다.’
좋아하는 이들과 좋아하는 공간에서 좋아하고 좋아하고 또 좋아하며 살아야지. 그렇게 세상을, 사람을 더 좋아해야지. 그럼으로써 조금씩 더 나은 어른이 되어가야지.
기왕 김연수 작가를 소환했으니, 그의 단편소설 제목으로 새해 인사를 건네야겠다. 다들 한 해 동안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모두에게 복된 새해!